확률이라는 종교
- Minwu Kim
- 2024년 12월 10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12월 11일
이번주가 지나면 좀 숨이 트일 듯 싶다. 내 머리를 안 굴리니 이렇게 또 아재네 글을 도둑질 해온다. 외부 반출 가능하다 하셨으니, 문제는 없다. <우연들이 모이면>에서 내가 적어놓은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확률적 사고의 부재가 만드는 혐오의 시대
한편, 최근에 계엄령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있어 생각을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정치 이야기는 아니고, 당면한 사안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냥 정치관에 대한 거시적인 이야기입니다.
최근 사건 때문에 온 사회가 떠들썩하고, 온라인도 뜨겁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격앙된 반응들도 만연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토픽입니다. 말 몇마디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마치 부모의 원수인양 미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 시대는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종, 성별, 지역, 기혼/미혼, 육아에 걸쳐 다양한 혐오의 형태와 표현이 만연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중심에, 확률적 사고의 부재라는 핵심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을 무개념-개념의 스펙트럼의 분포를 따라 히스토그램을 그려보면, 위와 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슈되는 일들은 거의 언제나 무개념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극단적인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무개념의 극단에 있는 남성의 행동을 이슈화하며 남성 전체를 비하하고, 극단적인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마찬가지 극단의 여성의 행동을 이슈화하여 여성 전체를 비하합니다. 진보 진영도,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단이든 극단의 행동을 찾아서 비난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그리고 도파민을 자극하기 때문에, 이에 편승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양산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해야할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념적이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회가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저 히스토그램은 '사람'들의 분포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의 분포라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슈화가 되면, TV나 유튜브에서는 그 사람 자체를 죄인으로, 무개념으로 매도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일정 수준의 고결함과, 일정 수준의 추악함이 혼재합니다. 그러니 위 그림을 다시 그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행동은 고정적인 게 아니라, 어떠한 확률적 분포에서 나타납니다.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간디도, 김대중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도, 모두가 일정 수준의 고결함과 일정 수준의 추악함을 지닙니다. 욕망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속에 추악한 면면이 도사리고 있고, 여러분이 싫어하는 누군가에게도 고상한 면면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론에서 드러나는, 혹은 본인이 보고 싶은 측면의 행위에 집중하여, 그 행위가 곧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못박아서 바라봅니다. 그 사람에 대해 확률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닌, 결정론적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까지 일반화를 해 버립니다.
특정한 사람의 행동 > 그 사람에 대한 일반화 >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 대한 일반화
= 결국 확률적 사고의 부재가, 특정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 대한 혐오에 불을 지핍니다.
이러한 결정론적 사고를 통한 낙인찍기와 협오는 인터넷 시대에 SNS, 언론/미디어를 통해 확대재생산됩니다. 당연히 사회는 점점 각박해집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1) 극단주의(나와 생각이 다른 저쪽편은 없어져야 하는 대상이다)로 치닫거나, 2) 회의주의(도찐개찐, 이놈저놈 한통속이고 똑같은 놈들)에 빠지게 됩니다. 중간에서 확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집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결정론적 사고로 오를 주식을 잘 짚어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맹신하게 되고, 그러다 손실로 빠져들게 되면 이놈저놈 도찐개찐이라며 경제 전문가에 대한 회의론에 빠지게 되고, 더 나아가 주식 공부에 대한 무용론까지 나아갑니다.
정치가 주식과 다른 점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이상론을 굳이 이야기해 보자면, 유권자로서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꾸준히 확률적 우위가 조금이라도 있는 후보 선택을 하자, 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나 정치라는 분야의 핵심은 이해관계의 조율이기 때문에,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극적인 선동 기사 속에서, '누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먼지를 갖추었는가?'를 따져서 꾸준히 확률적으로 차악을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상론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식과 정치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식시장에서는, 대다수 개인들이 확률적 사고를 피곤해 하기 때문에, 확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확실히 초과수익을 벌 수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대다수 개인들이 확률적 사고를 하지 않고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있으면, 확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표는 사표(死票)가 됩니다.
그 외에도 정치에 대해 확률적 사고를 지속하기 힘든 이유는 여러 단계에서 존재합니다.
첫째, 개인 레벨에서 - 정치에서의 확률적 사고는 단순히 수리통계적 측면의 확률적 사고가 아닌, 감정적 절제와 사람에 대한 이해 및 용서를 수반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식에서의 확률적 사고에 비해 감정적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 반대 진영의 사람을 이해해 보는 것 - 쉽지 않습니다.
둘째, 사회 레벨에서 - 확률적 사고를 통해 차악을 고르려고 해도, 정치/언론을 비롯한 사회의 이익 집단들이 최대한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은 정치지형에서 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최악들만 선택지에 남아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사회의 '일부 영역/집단'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술자리와 유흥을 수반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부'라는 것을 강조드립니다) 그러한 집단에서는 윗사람 혹은 '갑'의 위치에 있는 거래처 상대와 유흥에 나가고 그래야만 승진하고 딜을 딸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결국 비즈니스/윗선에서 돌아가는 일들이 바깥에 나가선 안되는, 떳떳하지 못한 음지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술자리/유흥 속 일탈이라는 약점을 공유하는 '공범'들만 그 리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계에서도 결국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은 배제하거나, 먼지를 어떻게든 묻히거나, 그것도 안되면 티끌이라도 찾아서 언론으로 확대재생산하거나 하면서 도찐개찐을 만들어 버립니다.
셋째, 국가 레벨에서 - 강대국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구한말에도 지배계층은 친러, 친청, 친일, 친미로 나눠 끊임없이 다퉜듯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 지형 속에도 친중, 친일, 친미의 3파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 국가에서 스폰받는 정치인도 적지 않을 겁니다. 타국의 국가 선전기구로 모 국가에서 시끄러웠고, 여러 선진국에서 이슈화되어 전부 퇴출된 기구가 국내 대학들에는 버젓히 들어와 뿌리내려 있는데, 미디어에서 이슈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프레임으로 정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 일견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이해가 많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계속해서 분열되어 있는 정치 지형, 극단으로 치닫는 혐오와 갈등, 그 속에서 낮아지는 국가적 자존감, 사라지는 애국심일 것입니다.
변화는 점진적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야 하는가?
우리가 상기해야하는 것은, 많은 유의미하고 건강한 변화는 가랑비에 옷젖듯 점진적이라는 점입니다.
주식시장에서도 상승은 점진적으로 오고, 하락은 갑자기 폭락세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옵션 시장에서도 하방의 풋옵션이, 상방의 콜옵션보다 비싼 'Volatility Skew' 현상이 나타납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운동을 하고 식단 관리를 하더라도, 몸을 만들고 건강해지는 것은 다년간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투자에서 확률적 우위를 좇더라도, 실력이 올라가고 초과수익을 내는 투자자가 되는 것은 다년간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도 다년간, 여러 세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하루이틀만에 가시적인 변화가 없다고 해서 허탈해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내 노력이 의미없다고 느낄 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 자식 하나를 사랑과 정성을 쏟아 잘 키우는 일이, 다음 세대를 바꾸는 가장 위대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역사가 진보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전보다 현재 사회는 분명히 더 나은 곳이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온 90년대, 2000년대는 꽤나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MZ세대를 많이 욕하지만, 꽤 유의미하게 20대들을 많이 채용해본 입장에서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 비해 훨씬 더 똑똑하고, 스펙 좋고,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결정론적 사고로 도박식으로 투자하는 사람들이 반짝 돈을 벌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확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듯이, 역사의 흐름도 결국은 합리와 이성의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허탈해하지도 말고, 허무해하지도 말고, 혐오에 동참하지도 말고, 꾸준히 확률적 사고를 하면서 주위에도 확률적 사고와 용서의 마인드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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