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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다스리는 법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4월 10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8월 1일

이쯤 되면 한 번 정리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화를 다스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덜어내는지였다. 그 과정 속에 겪은 시행착오들을 톺아본다. 그렇다면 다음 번에는 보다 시간 낭비를 덜 할 수 있으리라 본다.


1.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자의식이 과잉이라 "내가 겨우 이런 일도 못 품어낼 옹졸한 그릇이 아니다" 하고 애써 부정했다. 그렇게 참다참다 결국 터지더라. 그제서야 이게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소파에서 굴러떨어지는 영상을 하나 본 적이 있다. 아기는 바로 울지 않았다. 대신 한 3초 간 벙쪄있었다. 엄마가 놀래서 허겁지겁 뛰어오니 그제서야 뿌에엥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리더라. “내가 응당 울어야 할 타이밍인가”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차가 있었던 것이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2.사태파악이 된 후 한 일은 미움의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사실 많이 헷갈렸었다. 꼭지가 돌아버리면 이성적 판단이 안 된다. 모든게 다 마음에 안 들고 짜증이 난다. 그래서 응당 화 낼 것과 화 내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데까지 많이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그 왜곡적인 물타기와 가스라이팅에 하마터면 끔뻑 속아넘어갈 뻔 했다. 그 사람의 사과는 과녁을 벗어났다. 방향성이 맞지 않았던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아쉬울 수는 있어도 미움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미움의 이유는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일련의 무책임한 행동들이 나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닌 여러번이었다. 수차례 명확히 언질을 주었음에도 말이다. 나의 진심과 신뢰가 착취당했다는 것이 내 분노의 이유다. 그리고 그런 취급을 당했음에도 관계를 망칠까봐하는 두려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내 무능함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내가 못 났으니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화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그래야만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래서 최우선으로 그 사람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겠지, 너무 일이 많아서 힘이 들었겠지, 서툴러서 그랬겠지, 나를 해코지 할 마음은 없었겠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애써 그 사람의 행동을 합리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분노는 이 정도만 해도 상당 부분 사그라든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랬을 경우에만 효력이 있다. 문제는 이번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납득이 안 됐다는 것이다. 어떠한 구실을 갖다놓아도 내가 착취당했다는 것 외엔 내 머리로는 다른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 방법의 한계는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객관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 자신이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 단계를 넘어서더라도, 그 모든 행동들을 과연 정말 합리화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아무리 좋게좋게 마무리를 하려 해도, 다시금 성질머리를 내고, 시간 지나 아무 일 없었던 척 말을 붙이고, 거기에 뒤에서 내 험담까지 하는 모습에 넌더리가 나버렸다. 내심 아니길 바랬는데, 씁쓸했다. 뭐 아무튼, 다시금 착취의 수위를 높이는 낌새를 보이는데, 내겐 그 정도까지 헤아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합리화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4. 그 다음으론 불행을 바랬다.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을 떠올리며 말이다. 하지만 뿌린대로 거둔다는 1차원적인 내러티브는 그저 힘 없는 자기최면이다. 그런 유치하고 단순한 인과응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나야 괴로움 속에서 신음했지만, 그 사람은 애진작 자기합리화로 마음을 가벼이 했을 것이다. 사람이란게 원래 방어기제가 있어 합리화와 자기기만을 통해 죄책감을 덜어낸다. 이건 그 사람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나도 쉽사리 그 사람을 성토할 수가 없었다. 고로, 이 역시도 실패했다.


5. 자연스럽게 이어진 수순은 귀책사유를 나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애진작 끊어내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겠지, 단호하지 못했던 나의 잘못이지, 강단 없이 물러터진 내 잘못이지, 이런 식으로 화살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했다. 이러는 이유는 결국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함이다. 차라리 나의 잘못 때문에 받은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 잘못 없이 당하는 억울함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이 방법은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문제가 있다. 정말 잘못했으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반성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해 "전부 내 잘못이오"하고 독박을 쓴다면, 나는 내 모든 행실에 대해 반성하고 검열을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다 자기파멸에 이르기 딱 좋다. 사이비 종교 신자, 성폭행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 등, 모두 이런 메커니즘으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린다. 정작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건 나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실패했다.


6. 그 다음으로는 "개가 짖는구나", 내지는 "똥 밟았구나"하고 마는 것이었다. 단순히 누군가를 사람 이하의 짐승새끼 취급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애달픈 정신승리이며, 알량한 선민의식이다. 요지는 인간이란 종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인간은 얼핏보면 고등하지만 결국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에 불과하다. 무시당하면 화가 나고, 배신 당하고 괴롭고, 칭찬 받으면 기분 좋고, 맛있는 것을 보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다. 인간을 이런 입출력이 정해진 기계로 본다면 보다 미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모기가 내 피를 빨아갔다고 몇개월 동안 미워할 사람은 없다. 어떻게 이 모기한테 복수할까 궁리하지 않는다. 애초에 분노와 화는 대등한 존재에서부터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사람은 그저 그런 상황에서 책임 없이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르고 보도록 프로그래밍 된 인간일 뿐이다. 나 역시 그 사람의 몸뚱아리에 태어나, 그 사람이 겪은 모든 경험을 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타인을 그저 그런 동물로만 본다면, 나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건 보통의 경륜으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그래서 이 역시 실패했다.


7. 그 다음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시도했다. "화"라는 감정은 무언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혹은 내 통제를 벗어날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화가 식지 않는 것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파악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심리상담을 받으며 들었던 말이 있는데, 바로 지나간 과거와 타인의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뻔한 말이지만, 제정신이 아닐 때는 이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다했다. 정중한 언어로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을 정확히 피력했다. 물론 더 강단있게 나오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관계가 빠그러질까봐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설령 그 방식이 지금와서 보면 너무 물러터진 호의였더라도, 그 당시의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이미 벌어졌으며, 지나간 일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깬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과거의 무게가 보다 가벼워진다.


8. 그 다음은 증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다짐할수록 그 감정은 나를 비웃듯 되려 부풀어올랐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왜 이 마음을 삼켜내고 싶은지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 첫째로는 미움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정말 진심을 다한 사람한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다.

  • 둘째로는 미움의 파괴력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미우면 오만가지 나쁜 마음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미움이 너무 크면 화가 터져버렸을 때 어떤 감당 못할 사달이 날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참아내는 것이다. 화가 안에서 터져버리면 내 오장육부는 다 찢어져버려도 그 피해가 애먼 타인에게 전가되지 않으니까. 사고 치고 죄책감에 허덕일 바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 셋째는 나르시시즘이다. "나는 이 정도 감정 정도는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야"를 보여주고 싶은 알량한 자기애이다.

하지만 참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한 번에 삼켜낼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럴 때는 조그맣게 분해해야 한다. 음식을 덩어리 채 삼키면 체하지만 꼭꼭 씹어먹으면 소화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럴려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해줘야 한다. 상처를 받았기에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건 자책할 일도 아니고, 창피해 할 일도 아니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애써 감당하려 드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다. 한낱 인간이 신인 척 하면 탈난다. 나의 그릇의 크기를 파악하는 것도 큰 지혜다. 미움이란 감정을 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고자 했다.


9. 그 다음은 선과 악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해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지난 일기들에 적어놓았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특정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어도 악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환경의 산물이다. 나를 힘들고 비참하게 한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며,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친구일 것이다. 심지어 한 때 나에게 있어서도 아껴 마지 않는 사람이었다. 절대적 가치는 없다. 사람은 변화하며, 그에 따라 사람 간의 인연도 변화한다. 이렇게 꼬여버린 관계도 몇가지 짖궂은 우연들이 중첩된다면 확률적으로 충분히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라고 했다. 그걸 이해하고 나면, 내가 당한 일들의 부당함과 부조리함에 대해 보다 덤덤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전부 다 내 잘못은 아니었단 것, 불가항력적이었단 것,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무책임한 운명론적 사고일지도 모르겠지만, 삶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나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10. 그 다음은 손익을 계산을 해보는 것이었다. 매몰비용이 의사결정시 고려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고등학교 경제시간에도 나오는 얘기다. 누군가 나에게 쓰레기를 던지고 갔는데, 그 쓰레기를 주워다 요리조리 뜯어보고 살펴보는 것은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여기에 이토록 메여있던 것은 그간 입은 정신적 타격이 커서인 것도 크다. 괴로워한만큼 나에게 댓가가 따라야 한다는 보상적 사고방식은 틀렸다. 아무리 뒤져봤자 쓰레기에서는 금덩이가 나올 수 없다. 내 등골 빼먹는 사람,내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내 삶에 있어 쓰레기 같은 것이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고이 넣어버리면 그만이다. 더 이상에 과거에 발이 묶여 현재를 버릴 수는 없다. 아니, 내가 여태 봐온 그 사람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내가 이랬던 것을 알면 내심 자랑스러워 할 것 같다. 그게 싫어서라도 안 되겠다 싶었다. 이를 인지하면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쓸데없다는 것을 보다 빨리 알아차리게 된다. 물론 이 생각은 치료제보단 리트머스지에 더 가깝다. 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정신머리가 궤도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11. 그 다음으로는 감사하는 것이었다. 이 경험 덕에 정말 많은 인식의 확장을 할 수가 있었다. 타이밍이 참 절묘하게도 모든 것이 더럽게 안 풀렸다. 사람한테도 당해, 일도 제대로 안 돼, 몸도 아파, 잠도 못 자, 멘탈이 나가니 주식도 꼬라박았다. 내 삶이 트루먼쇼였다면, 시청률을 올려보겠다고 작가들이 장난질 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밑바닥을 하루 빨리 체험해보는 것은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런 극단적인 환경에 놓여지니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의 모습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사람 보는 눈도 아주 조금은 더 생겼다. 그런 배움과 깨달음은 이런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렇게라도 여기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힘드니까 애써 정신승리를 하는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되뇌이다 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나는 정말로 전보다 영글었으니까.


12. 그 다음으로 남은 것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과거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아직 이 단계는 넘어서지 못했다. 미움을 온전히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아직 그러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도 이따금씩 숨이 잘 안 쉬어질 때가 있다. 최근에도 그 사람이 나를 옥상에서 밀어버리는 개꿈을 꿨다. 그럴 땐 참 화나고 억울하다.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아물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어설픈 용서는 안 하니만 못하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난 이미 앞선 열한단계를 지나오며 충분히 많은 것들을 감당해냈다. 아니 사실, 이쯤 되니 그냥 나쁜 새끼 취급하고 살아도 괜찮지 싶다. 굳이 뭔 또 너그러움을 보태나. 살면서 꼴뵈기 싫은 사람 몇 명 정도는 있어도 전혀 지장 없더라.


13. 마지막으로 할 일은 자기 반성이다. 계산기를 두들겨본다면 나는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후안무치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근시안적이고 멍청해서 자초한 일이었다고 해도 딱히 할 말 없다. 하지만 그걸 정면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체력이 내겐 없었다. 당시의 나는 너무 위태로워서, 정신승리와 자기기만으로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내야했다 (거봐라. 사람은 다 자기기만으로 죄책감을 덜어낸다. 나나 그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 도긴개긴이다). 하지만 미룬 숙제는 결국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


사실 아직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 했으며, 여전히 과정 속에 있다. 말은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았지만 화를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너무 어렵다. 인식과 실천 사이에는 몇광년의 간극이 있는 듯 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살아가는데 아마 이런 순간들이 몇 번을 더 있을 것이며, 이는 피하고자 해도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있다면 좀 더 좋은 회복탄력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쉽지 않은 과정을 견뎌왔다. 으아아아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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