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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의 표현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5월 6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4일

"잘했든 못했든 상관 없다. 최선을 다했으면 된거다" 라는 식의 말은 다들 들어봤을거다.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입에 쉽사리 붙지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직역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짜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 근 몇 년 간 그나마 가장 "최선"이란 단어에 가까웠던 때는 복학 후 2학년 1학기 때였던 것 같다. 그 땐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 못한다. 허투루 보낸 시간들이 있었고, 풀어진 시간들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정말 열심히 했더라도 그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건 나 같이 게으르고 참을성 없는 일반적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정주영이나 머스크 같은 대단한 사람들도 최선에 다다른 적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잘 알고 있다.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은 정말로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고의 선에 다다랐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보다는 스스로에게 떳떳한 만큼 노력했다는 정도를 표현하는 관용구이다. 한국말에는 단어가 글자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꺼려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하려다가도,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텐데, 그럼 이건 최선이 아니었겠지" 하며 자기검열을 했다. 그렇게 그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대신 "내 나름 열심히 했다"라는 식의 밍밍한 표현으로 얼버무렸다.


비단 최선을 다했다는 말 말고도, 나는 최상급의 표현을 쓰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주위에 보면 "미친듯이", "죽도록", "말도 안 되게" 등 표현을 즐겨쓰는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그런 표현들을 옆에서 듣고 있으면 조금은 거슬렸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미칠 것 같거나 죽을 것 같은 경험은 아주 드물다. 사소한 일들에 그런 과잉된 표현을 쓰는 것이 다소 호들갑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런 생각도 든 적이 있다: 이렇게 작은 일에 이런 최상급의 표현을 소진한다면, 나중에 정말로 미칠 것 같고 죽고 싶은 고통이 찾아올 때 마땅히 표현을 할 도구가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좋아해"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해도, "사랑해"라는 말은 입에 달라붙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사랑"이라고 불려질만큼 대단한 것인가 싶어서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걸맞으려면 이것보다도 더 숭고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다미가 정말 예쁘게 나왔던 <그 해 우리는>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4년 가까이 만난 연인이 사랑한단 한 마디 안 하다가, 유학 전에 간 마지막 여행에 가서야 그 말을 전한다. 그 드라마처럼 "사랑해"란 말은 그렇게 정말로 최고로 로맨틱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과히 영화적인 환상을 품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나고 와서 보면 왜 그랬나 싶다. 풋사랑이든, 농익은 사랑이든, 진심을 다한 이상 내가 한 것은 다 사랑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나는 최상급의 표현을 아껴두려는 성향이 있다.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정도를 표현하는 언어가 0에서 100까지 있다고 치면, 나는 아무리 좋거나 나쁘더라도 75 이상을 넘어가는 어휘를 삼갔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그게 참 별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대부분의 일들이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럴 때 마다 온전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미래 때문에 언어를 아꼈다. 그게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그런 모습이 참 바보같다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최상급의 표현을 지양하는 습관은 비단 내 말버릇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건 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시선을 미래에 둔 채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다. 항상 사서 걱정했고, 항상 다가오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 수세적인 태도 탓에 현재의 나는 행복하지 못했고, 현재가 행복하지 못해 그 미래가 현재가 된 시점에도 쉽게 행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도, 미리 걱정을 한 것은 아무런 완충효과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미리 걱정을 했음에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증오감만 커졌다. "앗싸! 드디어 '죽도록 힘들다'는 말을 쓰기에 손색이 없는 순간이 왔군. 아껴두길 잘했어!"하는 마음은 당연히 추호도 없었다.


19년 9월에 갔던 LA 여행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생각이 난다. 해가 질 무렵, 식사를 마치고 베니스 비치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탁 트인 태평양 위로 시시각각 바뀌는 보랏빛 노을은 내가 살면서 본 일몰 중 단연 최고였다.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핸드폰을 꺼내 녹화를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순간이 휘발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에 최고가 될지도 모르는 일몰을 눈 앞에 두고서, 그걸 두 눈에 오롯이 담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통해 구경하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였다. 그래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선 그 자리에서 해가 수평선 밑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 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내 사진첩에는 그 때의 일몰이 기록되어있지는 않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이 죽을 때 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을 더 자주 모아나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 돌이켜보면 현재를 오롯이 즐기지 못한 순간들이 많다. 기쁜 걸 기쁘다고, 슬픈 걸 슬프다고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고, 심지어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순간들이 다가오면 되려 슬퍼지곤 했다. 반짝임이 영원하지 않은게 싫어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더욱 두 눈 부릅뜨고 그 반짝임을 지켜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 후에 다가올 실망이 싫어서 더더욱 행복한 마음을 억눌렀다.


잔나비의 가사에 “행복이란 단어에 몸서리 친 적도 있어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딱 그랬다. 필요 이상으로 유난을 떨었던 것 같다. 무슨 오바요조 코스프레도 아니고 말이다. 왜 그런 회피 성향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그냥 어느 날 보니 내가 그러고 있더라.


지나간 일들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뭐 어쩌겠나. 지금부터 바꿔나가면 그만이다. 특정한 계기가 없었다면 바꾸는 건 더더욱 쉽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난 아직 스물넷 밖에 안 먹었다. 아직 만회할 시간이 많다. 요즘 그래서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사소한 일에도 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칭찬을 하려 하고, 설령 애매하게 친한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가도 웬만해선 반갑게 인사를 하려 한다. 생각보다 다들 잘 받아주더라.


이런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이런 쓸데 없는 걱정 사서 안 할거다. 생각이 바뀌면 또 그 때 가서 보면 될 일이다. 지금 나는 변해가는 내 모습이 좋고, 이 뿌듯함을 만끽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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