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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도구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9월 19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2일

채사장이 쓴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 <언어의 두가지 방향>이라는 챕터를 필사해본다.

생각해봄직한 포인트들이 많다.



관계에 대한 탐구로서 계획된 이 책에서 언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의무에 가깝다. 그것은 언어가 자아의 고립을 넘어 외부의 타자에게 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통로라는 것이 좁고 거칠고 어둡다는 점이다. 이곳을 지나는 동안 모든 처음의 의도는 엉망이 되고 너덜너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통로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렇다고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말귀를 못 알아듣고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이를 붙잡아 앉히고는 자, 그림으로 그려줄게, 하고 다른 보조 수단을 사용해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말과 글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은 이만한 소통 수단이라는 게 찾아보면 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는 언어생활을 한 지 한두 해가 아닌 우리에게 이제는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말과 글이 얼마나 오해의 소지가 많은지 대강이라도 느끼고 있어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사용한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노하우는 천차만별일 테지만, 이를 단순화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을 언어의 양을 늘리는 방향과 언어의 양을 줄이는 방향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A라는 의미를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할 때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하거나, 반대로 요약해서 핵심만을 전달한다. 이 두 방법은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선택해서 사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다만 보통은 습관적으로 하나의 방법만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장황하게 부연설명을 반복해서 나의 영혼까지 탈진시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과, 반대로 충분히 설명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는 나중에 왜 말귀를 못 알아 듣느냐고 나에게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을 대면하고 있으면 정신은 어느새 아득해지고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구천을 떠돌게 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잘못은 이들이 아니라 언어에 있으므로 우리는 언어의 태생적 한계와 인간의 존재론적 고립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단순히 이들에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상해본다. 인간의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었다거나 혹은 마음과 마음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사유와 느낌과 의도가 어떠한 정보의 손실도 없이 공유될 수 있었더라면 어떠했을지. 그런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인간관계의 복잡함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고통과 불필요한 갈등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살며, 언어의 불합리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타인에게 닿고자 하는 것을.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향. 양적 증가와 양적 감소는 현실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채 나에게 부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이것이 정교하게 손질되었을 때는 가치 있는 결과물로 귀결된다. 즉, 언어의 양적 증가가 끝에 닿았을 때는 책이 되고, 양적 감소가 끝에 닿았을 때는 시가 되는 것이다.


책과 시. 이것은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타인의 내면에 정교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신비하고도 독특한 도구이자 매개물이다. 우선 책부터 이야기해보자. 보통의 책이 대부분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의 사유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언어의 사용이 효율적이지 못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책이 쓰이는 일반적인 과정을 상상해본다. 여기 한 명의 저자가 있다. 그는 오랜 시간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과 고독 속에서 감정과 이념의 거대한 한 덩어리를 키워낸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 이 덩어리가 안정되고 아름다워지면 그는 혼자만의 향유를 끝내고 타인에게도 이 기쁨을 전달하고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곧 좌절한다. 타인에게 연결된 통로라는 것이 너무도 작고 하찮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볼품없는 곳으로는 사유의 결과물을 밀어 넣을 수 없다. 하지만 도도한 자존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을 알게 된다.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오직 덩어리를 잘게 부숴 통로를 향해 흘려보내는 것이다. 결국 그는 사유를 키워낸 시간만큼 덩어리를 잘게 쪼개에 보이지는 않는 타자를 향해 비좁은 통로로 밀어 넣는다. 그의 사유가 거대할수록 혹은 사유를 잘게 쪼갤수록 언어의 조각은 흘러넘치고 책의 부피를 키운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소중하지만 동시에 답답한 과정이 된다. 독자는 통로에서 쏟아지는 언어를 정성스레 받아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재료를 손실하고, 그 제한된 양으로 조각과 조각을 이어붙이며, 결국 어디까지가 작가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런다한들 어떠랴. 그렇다고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지 않은가.


다음으로 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시 역시 책처럼 자기 내면의 사유를 타인에게 그나마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엄선된 단어와 압축된 표현을 사용하는 까닭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어와 의미의 손실을 책에 비해 줄일 수 있다.


여기 또 다른 이, 오랜 시간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과 고독 속에서 감정과 이념의 거대한 덩어리를 키워낸 또 다른 이가 있다. 그는 충분한 시간의 흘러 이 덩어리가 안정되고 아름다워졌음을 알게 되자 혼자만의 향유를 끝내고 이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 한다. 그 역시 곧 타인에게 연결된 작고 하찮은 통로를 발견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이 통로가 마음에 든다. 그는 통로를 쓸고 닦에서 깨끗이 한 후에, 통로에 적합하고 딱 맞는 크기로 사유를 다듬고 압축하여 보이지 않는 타자를 향해 온전히 그곳으로 굴려 보낸다. 그의 사유가 거대할수록 혹은 그가 담아내고자 한 것이 많을수록 언어는 농축되고 무거워져 시의 길이는 짧아지고 깊이는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시를 읽어낸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동시에 답답한 과정이 된다. 독자는 통로에서 떨어지는 몇 안 되는 언어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지만 그 단단함 안으로는 어떻게 발버둥 쳐봐도 들어갈 수 없다. 결국 독자는 언어의 표면을 배회하며 표현에서 관찰한 제한된 정보만으로 저자의 사유와 의도를 추측해본다. 이 시는 이제 저자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런다한들 어떠랴. 그렇다고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지 않은가.


언어의 불완전성, 언어의 태생적 한계. 어쩌면 이러한 부족함이 자유와 즐거움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책과 시를 읽는 이유,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나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개인하고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비좁은 통로는 열린 장이 된다. 저자와 독자는 그곳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각자 깊게 생각하며, 비로소 작품의 의미를 함께 부여한다.



  1. 사람은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틀린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그 전에 "생각"의 범주를 정의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여기선 비트겐슈타인의 분류법을 차용해 "논리적 세계"만을 지칭하도록 하겠다. 그 나머지는 "말 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클라인블루를 보고서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다. 유남쌩? 하지만 논리와 비논리를 명확히 구분짓는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논리와 직관을 넘나들며 생각을 전개한다.

  2. 언어는 생각의 도구보다도 소통의 도구다. 하지만 언어는 비효율적인 매개이다. 하지만 표정, 그림, 소리 등에 비하면 그나마 가장 쓸모있는 도구인 것 뿐이다. 우리는 그저 단어의 배열을 최대한 쏟아낸 뒤, "유남쌩"을 남발하며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것 뿐이다.

  3. 소통의 매개는 꼭 언어가 아니어도 될지도 모르겠다. LLM으로 치면 임베딩 단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ReAtt 같은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겠다. RAG를 인퍼런스를 retrieval 후 generate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닌, document 자체를 임베딩 단위에서 박아넣고 추론하는 것이다.

  4. 글에서 이 말이 나온다: "상상해본다. 인간의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었다거나 혹은 마음과 마음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사유와 느낌과 의도가 어떠한 정보의 손실도 없이 공유될 수 있었더라면 어떠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은 이게 불가하지만 기계는 가능하지 않은가?!?!? 인간이 온전한 소통을 못하는 이유는 온전한 뇌의 복제품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는 명시된 파라미터 조합들 아닌가. 온전한 소통이 가능한 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와닿지 않는다만, 곰곰이 더 생각해봄직 한 것 같다.

  5. 아니, 다시 생각해봤는데, 온전한 소통이 가능한가 싶긴하다. 현실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손실이 적은 소통이 바로 나 자신과의 소통인데, 그것도 왜곡이 존재한다. 생각해보자. 내가 일기를 쓰면 어렴풋이 머릿속에 피어나는 상념들이 글이라는 형태로 실체화가 된다. 하지만 과연 나의 글이 온전한 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내 생각과 내 글 사이에도 역시 정보의 손실과 왜곡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왜곡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것이, 언어로 풀어내고서야만 정리되는 생각들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글로 내 생각이 승화(升华)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6. 아니,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실체화 되지 않는 생각이 과연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삼체의 面壁者 마냥,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그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럼 그게 뭔데. 아, 뭐 생각이긴 한데 관찰되지 않은 생각, 고로 효용성이 없는 생각, 이렇게 볼 수 있으려나. 나도 시부럴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7. 또 하나, 여기에 시간의 축을 더해보자. 이제는 허교수님의 축사에서 언급한 내용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타인으로 볼 수 있다. 소통 역시 시간 축의 인과율이 존재하기에, 글을 쓰는 행위는 과거의 내가 몇 초 뒤의 나에게 하는 단방향 소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LLM과 인간이 다른 이유는 인간의 파라미터는 늘 변화하지만, LLM은 추론시 파라미터들이 고정이 된다는 것에 있다. 즉, 시간 축의 흐름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시간 축의 흐름에서 자유롭다면 온전한 소통은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럼?


얘기가 점점 산으로 간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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