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들이 모이면
- Minwu Kim
- 2024년 3월 24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일 전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고등한 생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인간 역시 본능에 종속 된 동물일 뿐이다.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 특정한 호르몬이 분비 된다. 칭찬 받으면 신나고, 무시 당하면 분노하고, 굶으면 배 고프고, 안 자면 졸리고, 아이유 보면 기분이 좋다. 인간도 결국 특정 입력값이 주어지면 특정 출력값을 뱉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된 기계일 뿐이다. 이렇게 인간을 파악하면, 가치관이라는 것 역시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가치관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맥 빠지지만, 우연성인 것 같다.
사람의 가치관은 모두 인간이 직접 선택하지 않은 우연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릴 때 가정환경이다. 사랑 받고 자란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학대 받은 아이는 유기불안이나 인간불신을 지니고 살아갈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것은 그 아이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신의 주사위 게임으로 결정 된다. 이는 비단 가정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한 상황들을 매시 매초 맞닥뜨리며, 그것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사람은 전부 환경의 산물이다.
사람 간의 생각 차이는 다 여기서 기인한다. 인간의 짧은 수명, 그리고 인간의 뇌와 오감의 한계 탓에 우리는 살아가며 세계의 지극히 작은 일부 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한 명의 개인에겐 그 작은 편린이 세상의 전부이며, 그에 따라 자신의 사고체계를 확립해간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생각은 불완전하고 편협하다. 이는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특질이다.
극단적인 예시로 뉴스에 간혹 나오는 흉악범들을 들어보자.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대중의 입방아에 올라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그들의 잘못일까. 연쇄살인범의 공통점을 보면, 대부분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는 등의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 것으로 밝혀져있다. 만약 나라는 영혼이 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이 했던 모든 경험을 똑같이 거쳐왔다면,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나는 그냥 운이 좋았던거다. 어찌 보면 그 사람들도 안타까운 사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예일대 밀그램 실험, 스탠포드 감옥 실험도 이 banality of evil을 증명한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한 없이 악해질 수도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사회체계를 안정화 하는 것에 반하는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이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면 범죄자를 단죄할 수가 없다. 중범죄 피해자에게 "운이 안 좋았던 것 뿐이니 받아들여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말은 오로지 당사자 본인만 할 수 있다). 단죄가 없으면 사람들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불안상태로 치닫을 것이다. 지금 사회계약론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이 얘기는 여기서 멈춘다. 아무튼, 이는 사회체계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에 받아들이기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운명론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선악을 이해하는데에 훨씬 좋은 접근법 같다.
<도덕경>에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인자하지 않아, 모든 만물들을 강아지풀처럼 하찮게 대한다는 것이다. 즉, 하늘의 뜻은 좋고 나쁨 따위의 의도가 없이 무질서하다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초코송이 머리의 안톤 쉬거가 이 불인함을 상징한다. 그의 살인에는 이유나 동기가 없다.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다. 천재지변이 수많은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지만,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을 곳은 없다. 그냥 불운인거다. 이런 사고방식을 비단 이런 극단적인 순간 뿐만이 아닌 일상의 모든 순간들로 확장해볼 수 있다. 나에게 일어나는 행운과 불운이 어쩌면 내 자주적 행동에 따른 결과물이 우연의 중첩들일 뿐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응당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환경에 종속되며, 그에 따라 생각이 변화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내 딴에는 내가 명확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내가 자의식과는 무관하게 맞닥뜨린 사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갖게 된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당장 올해만 해도 내 생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은 미래에 내가 경험하게 될 일들에 따라 또 바뀌고 바뀌게 될 것이다. 선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서핑하듯 삶의 거대한 파도를 타며 그 때 그 때 최선의 대응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 뿐이다.
아, 물론,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항상 삶을 택하는 것이다. 이게 내 성역이라면 성역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명제만은 의심 없이 지켜나가기로 하자. 최소 이번 생은 그러기로 했다. 好死不如赖活着。어차피 의심을 품어봤자 날 기다리는 것은 답 없는 개똥철학의 쳇바퀴이다. 나이를 더 먹고 대가리가 더 굵어진다고 해서 내가 딱히 다른 돌파구를 찾아낼 것 같지도 않다. 이건 예상보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다. (내 저식이 생기는게 남긴 했다.)
이 모든 고민을 시작한 이유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뭐가 좋은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결핍에서 시작 된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팠던 것 뿐인데, 남은 것은 자기연민에 빠져 허덕이는 추한 모습 뿐이었다. 그게 억울했다. 그래서 결핍을 꼭 해소하고 싶었다. 지금 보니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무엇이 옳다고 여기며, 무엇이 틀렸다고 여기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나만의 가치관을 다듬어나가야 한다. 이런 가치관이 바로 서야 그에 따라 "내 기준"에서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방향성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이효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좋고 나쁜 사람이 어디있나요, 나랑 잘 맞고 안 맞는 사람만 있는거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제 이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생각을 나를 넘어 타인에게로도 확장시킬 수 있다. 내 생각의 그렇듯 남들의 생각도 그들이 마주하는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생각도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그 사람이 했던 모든 경험을 했다면 똑같은 사고체계를 갖게 되었을테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사람 간의 인연이란 것도 우연의 요소가 큰 것 같다. 당장 70억 인구의 지구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것 부터 놀라운 우연의 산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당시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생각인지, 어떤 성격인지에 따라 가까워지기도, 스쳐지나가기도, 악연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때 소중했던 인연이 미워죽을 사람이 되기도 하며,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 내게 딱 맞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건 타인에게만 해당 되는 일이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 소중한 친구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받아들이고 나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엇나간 악연에 대해서는 보다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지금껏 이어져온 소중한 인연들에는 더더욱 감사함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감사하게도 대체로 좋은 사람들 사이에만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상처 받는 몇몇의 기억들이 있다. 천성이 기존쎄와는 거리가 먼 유리멘탈이라, 그럴 때 마다 괴로움에 얼룩진 불면의 밤들을 견뎠다. 그렇게 고슴도치 마냥 가시가 돋혀 방어기제가 늘어났다. 그래서 사람 하나가 내 바운더리로 들어오려 할 때 마다 그걸 반기면서도 내심 불안해 했다. 저 사람도 내 뒤통수를 치면 어떡하나 하며 말이다. 하지만 인연의 특성에 대해 이해를 하고나니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러니 좀 덜 무서워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겁 없이 사람들과 연대하고 사랑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긴 것 같다.
그리고 말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은 언뜻 들었을 때는 슬프지만, 잘 생각해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다. 나 자신이 치가 떨리게 싫었을 때,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다"라는 말이 사형선고 마냥 무겁게 다가왔다. 나 자신이 평생 이 모양 이 꼴이라면, 나아질 수 없다면, 그것보다 절망적인 것은 없을테니까. 그래서 나는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어느 날 장기하와 얼굴들의 <Mono>를 돌리고 있었는데, <초심>이라는 트랙에서 뜬끔없이 울컥했다. 그 뽕짝스러운 멜로디에 내가 울먹이다니,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하마터면 똥꾸멍에 털 날 뻔했다. 하지만 “초심 따위 개나 줘벌려”라는 말에 큰 위로를 받을 정도로 난 메롱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때 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구원이 된다. 괴로울 때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좋을 때는 태만하지 않아야한다는 경각심을 준다. 고로, 세계의 가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버텨내는데에 무너지지 않을 뒷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다니, 대단히 만족스럽다. 이 생각이 내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꿀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그리고 이런 직감은 대체로 다 옳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