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경제 - 저물가시대의 끝
- Minwu Kim
- 2022년 5월 21일
- 6분 분량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단입니다. 프랑스 혁명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류는 항상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날이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치고 박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린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2022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경제 시스템의 재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전세계가 뭉쳐 분업하는 글로벌 경제가 몇십년간 지속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각자도생과 편가르기의 움직임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있습니다.
블록경제 이야기입니다.
1. 자유무역질서
이야기는 2002년 중국의 WTO 가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중국의 세계경제 합류를 의미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값싼 노동력이 세계경제에 합류하면서 전세계의 분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같은 선진국들은 고부가가치 산업인 테크나 3차 서비스산업에 집중하고,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통해 그들을 위해 생산하는 2차 제조업에 집중하는 식으로 말이죠.
자유무역질서는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선진국은 3차산업에 집중하고, 한국이나 일본은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가치 2차 산업에 집중하고,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토대로 제조업에 집중하고, 러시아는 농업과 에너지에 집중하고, 이런 식으로 세계는 각자의 역할을 정해 성장을 함께 도모해왔습니다.
자유무역질서는 생산성을 증대시킵니다. 분업화와 규모의 경제 덕에 따라오는 상대적 우위 덕에 말이죠. 인플레이션은 당연히 하락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오랜 기간 세계는 유례없는 저금리와 양적완화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약 20년이 지난 지금, 이 자유무역질서가 붕괴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린 이를 블록경제라고 합니다.
2. 블록경제 - 자유무역질서의 붕괴
블록경제(bloc economy)는 말 그대로 세계경제가 여러 블록으로 따로 묶인다는 것입니다. 냉전시대엔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국가가 한 블록,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또 다른 블록으로 묶였습니다. 오늘날 역시 냉전시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한 팀, 러시아와 중국이 한 팀,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실 이는 오래전부터 벌어졌던 움직임입니다. 21세기 들어와 중국의 덩치가 커지고, 반대로 미국이 90년대의 최전성기에서 피크아웃하고 완만한 하향세를 그리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양국의 체급차가 점차 좁혀지면서 현재 중국은 미국의 패권국 위상에 도전하려 들고 있습니다. 제가 <2편 - 달러> 에 길죽하게 얘기해놓았으니 다시 구태여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국간의 정치적 갈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미국이 설계하고 중국이 생산하는 자유무역질서에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을 확신으로 만들어 준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입니다.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약 70년 동안 총성이 없었던 유럽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반인륜적인 행위들은 감정적인 동요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실제적인 피해는 보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바로 공급망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유럽의 에너지 공급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죠. 유럽은 원유와 천연가스와 식료품 공급의 상당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위해 러시아산 에너지수입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 탓에 유럽은 극심한 물가상승을 겪고 있습니다. 당장 수치적으로도 높게 나오고 있고, 런던에서 일하는 제 친구한테 물어봐도 요즘 식료품비가 너무 비싸져서 먹고 살기 팍팍하다고 저한테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결국 최근에 유럽은 꼬리 내리고 다시 루블화로 에너지 수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것을 시사합니다. 바로 자유무역질서의 붕괴입니다. 여태껏 잘 유지되어온 전세계의 분업이 까딱하다간 바로 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방세계는 이제는 모든 생산을 최대한 국내에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시는 끝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당장 어제 바이든은 방한을 하며 삼성공장을 가장 먼저 들렸습니다. 반도체를 하루빨리 미국으로 들여오거나, 최소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죠. 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은 자국의 제조업 기업들에게 파격적인 감세를 약속하며 해외에서 자국으로 공장을 불러오고 있고, 셰일가스 혁명 이후 환경문제에도 불구하고 중동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시추허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럽 역시 같습니다. 비록 친환경이라는 시대정신도 너무 좋지만, 당장 늘어나는 에너지 공급난이라는 급한 불을 끄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전사업입니다. 전에는 원전사업을 친환경에너지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EU는 노선을 바꿔 원전사업을 적극추진하겠다고 밝혔죠. 이렇게 해서라도 대외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고립주의와 탈세계화 움직임은 미국과 유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양국은 이미 미국채 보유량을 대폭 줄여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SWIFT 제재로 자국이 들고있는 외환보유고는 미국의 으름장 한 번이면 종잇쪼가리가 된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의 탈달러 움직임은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도 수두룩 빽빽합니다. 스리랑카의 모라토리엄은 중국의 일대일로 뒤 숨겨진 의도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안보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뒤엔 본인들이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국채가 아닌 실물자산을 취한다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베노믹스에도 이뤄내지 못한 엔저가 이번에 터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것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블록화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저물가시대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냉전 이후 또 다시 명분이 실리를 앞서고 있습니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군사적 갈등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공급난을 감수할 바엔 차라리 돈을 더 들여서라도 자급자족 하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것입니다. 분업이 줄고 무역이 줄면 생산성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이는 물가상승 압력을 가져다 줍니다.
말이 다소 길었습니다만, 아무튼 돌고 돌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a) 2000년대 초 부터 시작 된 자유무역질서로 인해 생산성의 증가가 있었다.
b) 그 덕에 저물가, 저금리, 그리고 양적완화 기조가 유지 되었다.
c)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유무역질서를 망가뜨렸다. 세계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이 두 블록으로 나뉘어졌다.
d) 그래서 양쪽 다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한다. 공급차질의 리스크를 감수할 바엔 조금 비싸도 자급자족하겠다는 것이다.
e) 이는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고로 물가 상승 압력을 가져다 준다.
3. 고물가 시대에 살아남는 법
이런 큰 흐름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세계가 현재 근본적인 기류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코로나 이후 막대한 양적완화, 러시아 에너지 문제, 그리고 중국의 상하이 봉쇄로 인한 물류 병목 현상 만을 생각합니다. 그것도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연준이 긴축을 하고, 전쟁 문제가 해결이 되고, 중국이 다시 개방을 하더라도 저물가시대는 당분간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표면적인 사건들 뒤에 블록경제라는 보다 크고 근본적인 변화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장에 대한 제 중기적인 뷰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 뷰는 9편에 썼습니다). 중국은 본인들 발목에 족쇄를 걸어버리며 성장둔화를 자초하고 있고, 미중패권전쟁은 아직 엔드게임에 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연준은 인플레가 잦아들고 경기침체의 조짐이 보이면 재차 완화적으로 돌아설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블록경제는 고물가시대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연준이 금리인상을 하고 있습니다. 인플레 상승 압력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이 흐름대로 간다면 지난 20년간 저금리 기조로 인해 많이 쌓여있는 부채들이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미국의 펜션펀드들이 많이 불안한 상태이고, 중국의 부동산 버블도 쉽게 잡히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버블이 하나 둘 터질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현금흐름이 부실한 나스닥 성장주들은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무슨 거품이 어디서 어떻게 터지는지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런 고물가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까요? 투자자, 기업가, 그리고 개인, 이 세가지 관점에서 간략하게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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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투자자
사실 인플레이션에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는 제가 보탤 말이 별로 없습니다. 물가상승 기간에는 원자재가 강하다, 실질채권 수익률과 음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골드를 사라, 이런 것은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케묵은 얘기를 하나 재차 강조하자면, 독점기업에 투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독점기업"의 경제학적 정의는 가격결정력이 있는 기업을 의미합니다. 즉, 소비자에게 물가부담을 전가할 수 있는 강력한 기업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업들은 물가상승으로 인한 생산비용 상승에도 불구하고 튼튼하게 살아남습니다.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이 좋다고 사주기 때문입니다.
네, 뻔한 얘기는 그만하고 기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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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기업가 (특히 스타트업)
금융위기 이후 호황이었던 VC업계의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이러합니다: "초반의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덩치를 엄청나게 불려 시장을 독과점한다. 그리고 돈을 벌어서 breakeven한다." 아마존이 이 모델의 가장 대표적이며 성공적인 예시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적잖은 기업들이 이런 모델을 모방하였습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사용자를 늘렸고, VC들은 그에 동참하여 뒤에서 아낌없이 후속 투자를 해주며 밸류에이션을 팍팍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VC에게는 이것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인 저금리 양적완화 기조 덕에 유동성이 넘쳤고, 자금조달비용이 너무나도 저렴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설령 덩치를 불리는 데에서 오는 독점지위나 규모의 경제가 가져다주는 효용이 낮더라도, 자금을 때려넣어 일단 그 위치까지 도달하게 하는 방식이 수지타산이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물가와 고금리가 되면 상황이 바뀝니다. 유동성이 줄어들고 자금조달 비용이 늘어나면 후속투자를 받기 어려워집니다. 투자자들은 지갑을 닫고, 후속투자로 적자를 메꾸는 방법은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결국 현금흐름을 창출하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은 막대한 빚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이럴수록 진또배기들만 살아남습니다. 요즘 스타트업 보면 워라밸이나 원격근무, 심지어 해외여행하면서 근무한다는 식의 팔자 좋은 곳도 있는 것 같은데, 이는 모두 유동성 파티의 끝자락에 있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마치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때 사람들이 놀고 먹기 바빴던 것 처럼 말이죠. 이런 유동성이 줄면 결국 가면은 벗겨지고, 절제하고 근면하게 정진하는 회사들이 진정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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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개인
최근 열린 버크셔 주주총회에서 버핏이 재차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The best investment by far is anything that develops yourself, and it's not taxed at all." 케케묵은 말이지만 이런 말은 먹기 좋은 묵은지가 되지, 절대 썩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비는 실력을 쌓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면은 일절 들먹이지 않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임금상승률은 반드시 인플레이션에 맞춰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는 저 같은 젊은층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금리 저물가는 저임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동산 같은 자산소득은 끊임없이 오르는데 임금상승률은 낮으니 노동의 가치를 쉽게 폄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고물가 기조가 도래한다면 자산가치 대비 노동의 가치가 더 빠르게 상승하는 흐름이 올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하루하루 칼을 갈다보면 분명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찮으니 클로징멘트는 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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