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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꾸몄다.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1월 2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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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님이 "쉴 때 뭐하세요" 물었다.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30초 정도 생각하다 "저 그냥 침투부 보면서 킬킬대는게 전부인데요" 했다.


정신적인 요새가 빈약하면 사람이 쉽게 무너지는 것 같다. 내가 이번에 딱 그랬다. 마땅한 탈출구가 없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을 새해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방에 아무것도 안 들여놓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는 내게 있어 그저 지나가는 등용문일 뿐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선 누나가 물었다. 지금 아님 언제 할거냐고. 미래를 사는 나와 달리 현재에 충실한 누나다운 말이었다. 나도 그래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서 벽에 붙여보았다. A4로 뽑고 접어 붙인거라 모양새가 조악하다. 그래도 방에 들어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보이니 기분이 좋다. 못 다 붙인 작품들이 많다. 생각 날 때 마다 채워나갈 예정이다.


유현준 교수님이 공간에 나만의 질서를 부여하면 애정이 생긴다고 했다. 해보니까 동감한다. 이제야 방이 비로소 내 방 같다. 애정이 생겨 괜히 방 청소도 더 자주하고 그런다.


취향도 다듬는 것이라고 들었다. 계속해서 다듬으며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도 그런 과정을 늦게나마 밟아가고자 한다.



밥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데 누가 내 앞에 끼어들었다. 자기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더라. 어디 맡겨놓은 것 마냥 굴었다. 난 2분 넘게 서있었는데.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 친구 뒤에 서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여기서 참고 가는게 맞는지, 아니면 얘기를 해야 하는지.


이런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참아왔다. 그러려니 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화를 삼켜낼 그릇이 못 된다. 자질구레한 분노들이 사라지지 않고 하나 둘 쌓이다 끝끝내 터지고 만다. 그럼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운 나쁜 사람이 내 모든 감정폭력을 감내한다. 마치 폭탄돌리기 마냥 말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어치의 화만 감내하면 되는데, 나머지 이들의 업보도 한 사람이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남에게 불만을 피력할 권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상처를 안겨줄 마패까지 있는 건 아니다. 고로 결국 터져버릴 화를 삼키는 것은 선(善)이 아니다. 그건 나와 타인을 모두 다치게 한다. 내가 화를 얼마나 참아냈는지 생색내봤자 남들이 알 바 아니다. 아무도 나보고 참으라고 총 들고 협박한 적 없다. 지팔지꼰, 자승자박의 자기연민에 불과하다. 그걸 명분 삼아 사람한테 상처 주는 건 해선 안 될 짓이다. 그러니 남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 마음 챙김을 위해 평소에 화를 잘 비워내고 관리해야 한다.


이왕이면 다시는 그 죄책감에 시달리기 싫다. 너무 괴로웠으니까. 그래서 앞 친구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이번엔 괜찮지만 다음 번에는 뒤에 서라고, 줄에서 한 번 벗어났으면 끝에 가서 다시 서는게 맞다고 했다. 좋게좋게 얘기했더니 귓등으로 들었다. 그래서 정색하고 귀때기에다 다시 한 번 때려박아줬다. 그제서야 알아먹는 눈치였다. 아주 개운치는 않지만 내 의사를 표현했다는 행위 자체가 화를 상당 부분 털어내는 것 같다. 이런 사소한 일들에도 제때제때 올바르게 표현하는 버릇이 되어야 더 중요한 순간에도 적절히 처세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담사님이 감정은 걷어내더라도 필요한 불만표출은 꼭 하라고 했다. 그대로 실천했다. 만나면 칭찬 받게 자랑해야겠다.


졸업논문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난잡했던 코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클린하게 다시 짜는 중이다.


Feature engineering에 상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어떤 변수를 추가하고, 어떤 변수를 제외하고, 어떤 변수를 합칠지, 그런 디테일들을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렇게 기름기를 좌악 뺐다. 기존 117개의 변수를 37개로 대폭 줄였다. 그랬더니 지금 logistic regression만 돌렸는데도 AUROC가 벌써 0.7을 찍었다. 저번 학기에 별 짓거리를 다해도 0.67에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었다. 그걸 생각하면 큰 폭의 개선이다. 다다익선이겠거니 하며 무작정 다 때려박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더라.


이번 학기 군더더기를 모두 잘라냈다. 내내 붕 뜬 소리만 하던 교수님의 스타트업도 나왔고, 반년 넘게 주제 선정 마저 제대로 못한 연구도 그만뒀다. 그 때는 하나라도 얻어걸렸으면 하는 절박한 마음에 객기 부리듯 판을 벌렸었다. 그럴수록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속만 뒤집어졌다.


조급함이 모든 걸 다 망친다. 곁가지는 쳐내고 가장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로 했다. 양보다는 질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말을 안 믿는다. 가만히 죽치고 앉아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내 문제는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한다. 막막하게 느껴질만큼 뜯어 고칠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 고칠 힘이 다시 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생아 마냥 별거 아닌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 내 취향을 다듬는 법, 마음을 다스리는 법, 등등등. 나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요즘 내 모습이 그래도 좀 마음에 든다.


갑자기 또 순조로우니 또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는 그 습관 고칠거다. 물음표 대신 느낌표만 던지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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