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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편하게 하세요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4월 19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13일

진짜 사소한 일인데, 그래도 고민해봄직 해서 써본다.


어제 일기에도 썼는데, 후배한테서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대처법을 잘 모르겠다. 특히 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더더욱 난감하다. 내가 왜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나 좀 생각을 해봤는데, 대충 3가지가 있는 것 같다:


  1.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관계를 정의내리는 것 같다. 마치 "오늘부터 우리는 말 놓는 사이"라고 칼로 무 자르듯 선언을 하는 것과 같달까. 존댓말과 반말은 정서적 거리감이 확실히 다르다. 반말을 하면 꼭 진짜로 친해져야 할 것 같다. 마치 어릴 때 동네 아줌마들이 서먹한 어린 애들을 한 곳에 모아다가 "친하게 지내" 하는 것과 같다. 그게 영 어색하다.

  2. 꼴랑 나이 많다고 말 놓는게 추해보인다. 특히 주위에 "내가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할게"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뭐 한 삼촌 뻘 정도 되면 몰라, 사실 위 아래 5살 정도는 다 고만고만한 친구라고 본다. 나는 그런 모습을 닮기가 싫다. 아무리 후배쪽에서 먼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도 말이다. 그걸 넙죽 받는 것도 별로다. 그래서 나는 서로 말을 편하게 하자고 제안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럼 문제는 다시 1번의 이유로 돌아간다. 나한테는 거부권이 없다. 이거 완전 가불기다.

  3.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부반응이다. 아까 나이 많다고 으스대는게 싫다고 했는데, 이 "싫음"에 디테일이 좀 있다. 싫음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본능이 싫어하는 것과 이성이 싫어하는 것. 행동경제학자 다니엘카너먼 식으로 얘기해보자면 시스템 1과 2의 차이이다. 본능이 싫어하는 것은 시스템 1이 싫어하는 거다. 이불이 안 개어져 있거나, 되/돼 구분 못하는 거나,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이성이 싫어하는 것은 시스템 2가 싫어하는거다. 이를테면 말 끝 마다 돈돈 하는 사람을 보는 것, 훈련소에서 여자 얘기 없이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등이 있다. 이에 대한 거부반응은 보다 고차원적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일종의 "투사"다. 나도 본능으론 저런 걸 좋아하는 면모가 있는데, 머리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생기는 반응이다. 설명이 길었는데, 아무튼, "말 편하게 하세요"를 들었을 때 느끼는 거부반응은 후자에 해당한다. 후배가 나한테 그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숙이고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본능으로는 그게 좋은데, 머리로는 그걸 좋아하는 내 모습이 싫으니까 고장이 나는거다. 그 속내를 숨기려고 괜히 더 그러는거다. "나는 이런 거 싫어해" 라는 것을 강력히 어필하여, 그 속내를 숨기고 싶은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원하는 것은 결국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은 상대의 의도와 내 의도의 방향성이 같을 때 만들어진다. 그래서 후배 입장에서 선배한테 말 편하게 하라는 의도를 좀 파악해볼 필요가 있겠다. 내가 후배한테는 말 놓으라고는 몇 번 해봤지만, 선배한테 먼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그림이 영 어색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선배한테 먼저 말 놓아도 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마음인지 직관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머리를 굴려보자면 대충 아래와 같은 네가지가 있다:

  1. 친해지고 싶어서다. 나라는 사람이랑 가까워지고 싶거나, 아님 말을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이미 가까워져서 그런거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문제가 안 된다. 이미 사이가 가까우면 말을 놓는 그 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2. 전형적인 한국식 예의이다. 후배 입장에선 선배가 말을 높여하는 것이 되려 불편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부분은 공감이 잘 안 된다. 나는 연장자가 나한테 존댓말해도 전혀 불편한게 없다. 비록 내가 뼛속까지 한국인이지만, 어쩌면 이 부분에선 어릴 때 한국에서 안 살아봐서 생기는 문화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3. 족보 정리일지도 모른다. 족보라는 것도 내가 진짜 싫어하는거다. 하지만 그것도 버젓이 하나의 thing이니 어쩌겠나.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후배1과 나는 말을 텄다. 후배2와는 말을 안 텄다. 그래도 후배1과 후배2는 친구 사이다. 후배2 입장에서, 이 선배가 내 친구랑한테는 반말을 하는데 나한테는 존댓말을 한다. 그게 그 후배 입장에선 불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런 경우도 있다. 후배 입장에서 선배1과 선배2가 있다. 선배1은 이미 반말을 한다. 하지만 선배2는 존댓말을 지킨다. 같은 선배인데 차별대우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예의 없다고 생각해 말을 놓으라고 하는걸지도 모른다.

  4. 아니면 반대로, 오히려 후배들이 외국물을 먹어서 그런 경우일수도 있다. 유학을 하면 느끼는 것이, 영어의 친밀도와 한국어의 친밀도는 다르다. 영어에는 한국어와 달리 존댓말/반말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지자면, 영어의 온도는 한국어의 반말의 온도에 더 가깝다. 이러니 영어가 더 편한 한국 친구들은 존댓말의 온도가 되려 더 어색한 것이다. 그러니 말을 놓으라고 하는 걸수도 있겠다. 아 물론, 이런 경우에는 나보고 말을 놓으라고 하고 본인도 알아서 놓는다.


그럼 나의 대처법은 또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니까, 내가 갖고 있는 패가 없다. 놓으라고 하면 나는 놓을 수 밖에 없다. "아뇨, 우리는 아직 그만큼 친하지 않으니 존댓말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딴 싸가지 없는 식으로 나올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내가 여태 대응한 방식에 수정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장 많이 한게 나의 어색함을 구태여 연출한 짓이다. 이를테면 "그럼 말 놓을...게..." 하며 말 끝을 질질 끄는 것이다. 그 되도 않는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전혀 멋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정반대의 액션을 취해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유, 후배한테 여태 말 못 놓느라 힘들었네", "편하게 해. 아 물론 내가 편하게" 하며 괜히 유쾌한 꼰대인 척을 하는거다. 꼰대인 척 하는 사람은 꼰대가 아니라는 점을 은근하게 부각해 "나는 꼰대 아니에요" 시위를 하는거다. 그런데 그것도 영 피곤하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내가 부자연스러운게 마음에 안 든다. 거의 알러지 반응이 생길 정도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최선의 행동강령은 그냥 무던한 척 넘어가는 것이라는 거다. 반말 존댓말 따위 전혀 연연하지 않는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했을 때 미소를 띄며 "그래, 그럴게" 하고 태연한 척 바로 반말로 말을 이어가면 된다. 그 순간의 어색함만 뻔뻔하게 참아내면 되는거니까. 그게 나도 편하고 상대도 편하다.


그리고 말을 놓아서 어색한 사람과 가까운 척 해야 해서 싫다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첫째로, 아까 얘기했듯 애초에 상대는 그럴 의도가 별로 없다. 그 사람도 그냥 불편하거나 예의 지키고 싶어서 그런거다. 나 혼자 지레 짐작하는 것 뿐이다. 뿐만 아니라, 말 놓는다고 친해지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친밀도와 반말은 큰 상관이 없다. 셋째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더 좋은 일이다. 새로운 인연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말이다. 인간관계의 성질을 새로이 이해한 나는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적어졌다. 마지막으로, 후배 입장에서 나름 용기 냈는데, 내가 속으로 "왜 벌써 말 놓자 하지, 난 불편한데" 하는 것도 그 사람 입장에서 진짜 서운한 일이다. 그렇게 야뱍한 사람 되진 말자고.


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선배나 연장자한테 말 먼저 놓으라는 말은 못 할 것 같다. 그 사람도 나처럼 불편해 할까봐 말이다. 그게 내 나름의 배려방식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을 존중하는데 있어 반말 존댓말은 전혀 상관이 없다.


참 별 거 아닌 얘기로 주저리 주저리 오래도 떠들었다.


P.S. 새벽의 업데이트다. 술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냈는데, 친구들은 연장자만 반말을 하고 밑사람은 존대를 하는 구조가 어색하지 않다고 했다. 나한테는 그게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옵션이었다. 서로 존대하거나 서로 반말하는 옵션만 있었을 뿐이다. 혈관에 김칫국물이 흐르는 뼛속까지 한국인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문화차이가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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