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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것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3월 1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9일

드디어 찾았다 시바꺼. 나르시시스트였다. 역시 약은 약사에게, 정신은 정신과 선생에게 물어야한다. 아전인수격의 확증편향이 있을 수 있다만, 오늘 나는 그냥 이 이론을 믿으련다. 융이랑 프로이드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겠거니 하고 그냥 믿어버릴거다. 의심하기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몇몇 사람들의 그 행동패턴이 너무 높은 타율로 설명이 된다.


아무튼, 오늘 정신분석학 이론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선"에 대해 좀 끄적여보고 싶다.


잘 생각해보면, 나르시시스트와 非나르시시스트 사이를 가르는 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이분법보다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크고 작게 띄고 있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남탓하는 경향,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경향, 만만한 사람을 하대하는 경향 등등등, 과연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간사하다. 더 간사하고 덜 간사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나 "소시오패스"로 불리는 사람들은 그저 그 경향성이 타인보다 훨씬 강한 것 뿐이다.


월가아재님이 자서전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결국 나는 내 기준을 지켰고, 끝내 단 한 번도 성매매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리그에서 성공하기는 커녕 처절히 실패했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저 옆에 앉은 여성에게 손을 대지 않는 정도가 다였다. 그들은 그 사실을 위안 삼아서 자기합리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을 성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대의 나였다면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실제로 도덕을 지키는 일보다도 도덕적 우월감이 주는 쾌감에 심취해서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고한 태도를 알량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흔에 가까워진 지금은 안다. 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내린 결정은 결국 내가 맞닥뜨린 삶의 경로와 내가 만난 숱한 사람과의 교류에서 비롯된 우연한 결과물일 뿐이지, 나라는 존재가 특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특정한 환경에서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나도 망설이며 바지춤을 내릴 것임을.
나라는 인간의 알맹이, 그 본질은 도덕적으로 더 낫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언제나 욕망에 몸부림치면서도 사회적인 관계에서 오는 절제력과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자기애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뿐이다. 내가 U씨와 같은 경로를 살았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했을지, 아니면 더 심하게 행동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Z대표가 처한 환경과, 그가 겪었던 고생과, 그가 느꼈던 희노애락의 순간을 동일하게 경험했다면 나도 그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U씨도, Z대표도, Y팀장도 또 다른 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나일지도 모르는 그들과, 그들일지도 모르는 나, 그 숱한 나들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 동감하는 바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고 움직인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실은 환경과 태생적인 것에 상당 부분 좌지우지 되는 존재이다. 나 역시 특정 환경과 조건에 놓였다면 비슷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나 저들이나 도긴개긴이다. 실제로 20명 중 1명이 나르시시스트라는데, 5%는 꽤 높은 확률이다. 누구나 까딱하다간 저 짝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소리다. 마치 교도소 담벼락을 걷는 것과 같다.


다만, 여기서 "그러니 이런 사람도 가엾게 여기고 사랑으로 품자"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물론 그런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존경과 축복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깜냥이 못 되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경에 유명한 말이 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내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태복음 5:38-44)

정말 멋진 말이다. 세상 사람 다 저러면 참 좋겠다. 하지만 나는 저거 진짜 못해먹겠다. 나 같은 사람은 저런 그릇이 없다. 그리고 전에는 그 그릇을 넓히고자 애 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싶다. 한낱 인간이 신처럼 굴다가는 탈 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건 인정한다.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것은 나만 손해니까. 하지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주고, 속옷을 뺏기면 겉옷도 주고, 저 짓은 진짜 개에바다. 저게 유일한 천국 가는 길이라면 하나님도 진짜 치사한거다. 나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내 고혈 빨아먹으려는 인간들에게 내 사랑을 왜 주는가. 그런 예쁜 마음들은 아껴두었다가 진정 나를 위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옳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정도야 더 줄 수 있지만 내 재산을 갖다바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여워하라는데, 그것도 영 동의 못하겠다. 그건 얄팍하고 위선적인 선민의식이다. 간혹 보면 "나르시시스트는 평생 사랑할줄 모르는, 삶 자체가 지옥인 불쌍한 사람들이다", "저런 성향은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렇다는데, 어찌보면 참 안타깝다" 등등 악인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당한 사람들의 정신승리라고 본다. 가해자를 가여워한다는 것의 뒤엔 나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표출하고 싶다는 속내가 있다는 것이며, 그 속내가 있다는 것은 되려 그 가해자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누구는 연민을 빙자한 도덕적 우월감이 아닌, 진정한 안쓰러움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머리로는 아직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고로 그런 알량한 선민의식을 부릴 바엔 차라리 그냥 씨발놈년이라고 걸쭉하게 욕지거리를 뱉는게 나을 듯 하다. 그건 최소 솔직하기라도 하지 않은가.


요즘 부쩍 느끼는데, 사람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끊어낼 줄도 알아야 한다. 갈등은 무조건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걸 최대한 피해왔었는데, 그러다 어느새 착취 당하는 호구가 되어있더라. 그런 강단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군대가 없으니 전쟁이 나고, 군대가 있으니 평화가 유지되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니체가 그랬다. 착함이 유일한 선택지일 때 착한 것은 선함이 아닌 무능이라고. 이제 나도 좀 동의하는 바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힘은 무한한 친절과 배려가 아닌 명확하게 선을 긋는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게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말든 내 이익을 먼저 챙기겠다는 태도를 뜻한다. 하지만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내 처지와 능력이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고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바꿀 수 없는 관계에 매달리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를 존중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집중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할 때는 선을 그어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먼저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강한 사람"에 대한 생각도 바뀌는 것 같다. "강함"을 떠올리면 힘든 와중에도 묵묵히 참아내며, 편법의 샛길로 빠지지 않고 정도를 걸어내는 사람만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나의 약점과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걸 숨기지 않고 꺼내는 것이 더 강한 사람 같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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