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 Minwu Kim
- 2024년 4월 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3일
지인 중에 참 멋진 사람이 하나 있다.
같이 있다 보면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걸 어디서 느끼냐면, 그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덩달아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정말 신기하고 귀한 능력이다. 이런 사람을 어딜가나 환영받을 것 같다.
나도 그런 부분을 닮고 싶다. 그래서 그 사람의 특질이 어떤 것이 있나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첫째, 말을 예쁘게 한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은 고급스러운 문장을 구사하거나, 정제된 표현을 하는 등의 1차원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어휘력이 좋은거지, 말이 예쁜게 아니다. 과한 어휘력은 오히려 재수없어 보일 수도 있다. 말이 예쁘다는 것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선택은 아주 섬세하고 미묘하며, 겉보기엔 별 특별할 것이 없다. 듣는 사람은 그 말들에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그 말을 다시금 되새김질을 해야만 뒤늦게나마 그 점을 인지할 수 있다.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다. 내가 물론 말을 더럽게 하진 않지만, 예쁜 말을 구사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휘는 보다 직설적이며,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톡 쏘기까지 한다. 물론 그것은 틀림이 아닌 다름, 즉 개개인의 개성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 입으로 얘기하기 좀 민망하지만, 나의 언어감각을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 옆에 있으면서 나 역시 톡 쏘는 말보다 예쁜 말을 더 듣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더 예쁜 말은 구사하면 어떨까 싶다.
그 친구와 달리 예쁜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첫째로는 습관이다. 버릇이 된거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면, 어쩌면 나의 어휘는 진중함을 가리기 위한 의도된 가벼움과 시니시즘이 아닐까 싶다. 혹은 말을 좀 재미있게 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담백하고 예쁜 표현이 익숙치가 않고, 때론 낯 간지럽다. 그런 예쁜 말들은 정말 필요한 경우에서만 쓰는 것 같다. 이를테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쓸 때나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이다.
그렇다면 재미와 가벼움에 대한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아보면 어떨까. 이를 통해서 남이 듣고픈 말을 해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된다면 꽤 괜찮은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둘째, 경청을 잘하고 호응이 좋으며, 자기 얘기에 욕심이 없다. 사실 이건 너무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고, 나 역시 귀를 여는 것을 못하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한다. 생각도 많아졌고, 그걸 적확한 표현으로 담아낼 어휘력도 조금 늘었다. 그럴수록 내 생각을 뱉지는 않고는 못 배기는 수다스러운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말이 많아질수록 쓸데 없는 부연 설명도 늘어났고, 의도치 않은 말실수도 많아졌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을 해봤는데, 아마 평소에 말을 섞을 사람이 잘 없어서인 것 같다. 어쩌다보니 정말 고립적인 생활패턴을 갖게 되었다. 책상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물론 그게 아주 불편하지는 않다. 자리에 앉아서 할 일들을 하나하나 쳐내는 쾌감은 너무 좋으니까. 하지만 그래서인지 평소에 말을 할 욕구를 풀어내지 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일기를 많이 쓰는 것도 말들을 쏟아낼 창구가 많이 필요해서일지 모른다. 이게 참, 막상 써놓고 보니 내가 꼭 독거노인 같다.
사실 이것까진 괜찮다. 흔히들 침묵은 금이라고들 하는데, 말 많은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말 없는 사람보단 말 좀 하는 사람들이 훨씬 재밌다. 남 얘기 듣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 입 다물고 있으면 말은 누가 하고 소는 누가 잡나.
하지만 최악인 것은, 남 얘기하는 와중에 내가 뭔 얘기로 받아칠지 장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역시 정도만 지나치지 않으면 괜찮다. 누군가가 나에게 얘기를 털어놓을 때 "나도 그런 경험있다" 하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건강한 공감방식이 될 수도 있는거니까. 하지만 요즘 나는 남들이 한마디 하면 세마디를 받아칠 때가 있다. 그렇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버린다. 이거 정신 안 차리면 진짜 고집불통 개꼰대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말하는 내내 상대의 표정을 살펴가며 지루함을 느끼는지 수시로 눈치를 보는데, 요즘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찬호 아저씨 마냥 밀어붙이는 때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다시 그 사람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 분이 얘기를 듣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해봤는데, 진짜 별 거 없다. 그냥 듣고 웃고 적당히 리액션한다. 가만히 듣다보면 그 리액션에도 별 내공 없이 기계적일 때도 많다. 자기 얘기 덧붙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본만 해줘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얘기를 더 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 사람이 갑, 내가 을이 되는 상하관계마저 느낀다. 내가 마치 면접보는 것 마냥 잘 보이려고 용쓰는 것 같달까. 그런 대화들을 몇 번 하다보면 그 사람이 내 위에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실제로 그런 연구결과도 있는 걸로 안다. 단순히 입 닫고 적당히 리액션 하는게 전부인데, 얻는게 너무 많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니, 이스라엘에서 만난 Duneier 교수님이 떠오른다. 첫인상만 보았을 때 말주변도 없고 누가 봐도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훌륭한 ethnographer가 될 수 있었나 의아했었다. 하지만 나중 가서 깨달은 것이, 저것이 바로 ethnographer가 응당 가져야할 태도였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에 조용히 경청하니,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것 마냥 자기 얘기들을 우다다 쏟아냈다. <Sidewalk>라는 걸작이 어떻게 나온건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경청에서 한 마디 얹는 것은 기교이지,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침묵인 것 같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 주객전도 되면 망한다.
셋째, 자의식이 없다. 너무 쿨하게 자기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열등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비하 역시 없다. 가끔 그런 주제들이 나와도 너털웃음 하나로 손쉽게 넘겨버린다. 그래서 같이 있는 사람이 전혀 불편함을 못 느낀다. 이건 정말 대단한거다. 앞선 두가지 부분은 빠르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세번째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보통 내공으로는 가질 수 없는 단단함이다. 나는 이게 제일 부럽다. 나도 흉내를 내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척"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설령 척이 맞더라도 내 눈으로는 감별을 못하겠다.
이건 결국 자존감의 문제인데, 이건 너무 복합적이고 어려운 문제다. 당장 몇 문단으로 해결책을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내 자존감이 낮다고 인정하는 것은, 반대로 자존감이 아주 낮다고는 볼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고무적인 것 같다.
아무튼 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 되려면, 아니 흉내라도 내보려면 아래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가 있겠다:
재미와 시니시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예쁜 말을 구사한다. 굳이 언어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이를 위해선 "어떻게 기똥찬 기교를 부려볼까"가 아닌 "어떻게 배려하는 말을 구사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입은 닫고 귀는 열 필요가 있다. 경청을 잘하는 나는 지금 없고, 그걸 이제 와서야 알았다. 어떻게 두마디 할걸 한 마디로 줄일지를 최우선으로 고민해보자. 그리고 적막에 대한 알러지를 견뎌보자.
자의식을 내려놓고 자존감을 채운다. 음. 이건 나중에 따로 생각해봐야겠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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