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턴
- 5월 23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5일

에 왔다. 미시건 강 옆 벤치에 앉아서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바람이 좀 찬데, 후드티 모자를 걸치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옆에선 오리가 걸어다니고, 나무 위에는 청설모가 기어 올라간다. 잘 다듬어진 잔디 위 초록빛의 나무, 건너편엔 누가 봐도 부촌에서 볼 수 있는 주택들이 서있다.
미국의 그 넓은 땅덩이의 배꼽 같은 곳에 있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꼭 아무도 모르는 낙원에 온 느낌이다.
답답한 아부다비에서 떠나 환기가 필요했다. 살 것 같다.
지난 6개월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9월부터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며, 두번 씩이나 몸을 비행기에 욱여넣어가며 학회장에서 교수님들한테 눈도장 찍으러 쏘다녔고, 자소서를 여러번 고치고 고쳤다.
그러는 와중에 페이퍼를 하나 제출했다.
1월초부터 하버드에서 면접이 왔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면접일줄은 몰랐다.
그래서 3월까지 가서 뒤늦게 부랴부랴 카이스트 지원을 했고, 4라운드까지 가서, 5개의 페이퍼를 발표하고, 2번의 아이디어 프로포절을 내고, 보기 좋게 탈락했다. 이 쯤 되니 내 삶이 트루먼쇼인가 퍽 진지하게 의심을 했다.
면접 사이에는 미사일이 날아왔다. 그래서 오만을 거쳐 뭄바이 방콕을 찍고 중국으로 피난을 갔다.
그 와중에 icml엔 떨어졌다. 그리고 중국 30일 무비자가 지나고서도 전쟁이 끝날 기미가 안 보여 한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에서 메이저 리비젼을 거쳤다. 실험을 통으로 재설계 하고 다시 돌렸다.
그 와중에 한국에선 뒤늦게 연락을 이곳저곳 다 돌렸다. 감사하게도 서울대에서 교수님 한 분이 바로 구두 오퍼를 주셨다. 누구는 4라운드를 보고도 떨구던데, 누구는 4시간만에 답을 주셨다. 마르크스주의적 신드롬이 도질 뻔했지만 이내 가다듬었다.
하지만 1차 면접은 입학처 담당인지라, 그걸 넘겨야했다. 그래서 다 까먹은 선형대수를 부랴부랴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면접 가서 버벅였다. 면접 같이 단기간에 나를 드러내야하는 단판승부에 나는 젬병이다.
그리고 아부다비로 와서 논문을 갈무리하고 이제 새 연구를 파고 있는 것이다.
쉼 없이 달려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정신 없게 달려온 것 같다.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정신을 부여잡고 무언가에 집중을 못 한 것 같다. 물론 정말 강인한 사람은 그 와중에도 정신줄을 부여잡았겠지만, 나는 그냥 근근히 버틴 것 같다.
한 번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기엔 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 같았달까.
아부다비에 돌아온 이후론 사실 제대로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좀 지친 것 같다. 사실 1월에 박사지원 돌이켜 보면 미박 결과를 기다릴 때 쯤 부터 이미 나를 많이 소진했던 것 같다. 교수님은 이제는 더 이상 큰 의지가 안 되고, 학부생 뒤치다꺼리하며 3인분을 하기에도 힘이 남아있지 않다.
잘 쉬는 법을 배우고 싶다. 휴가를 맞아서, 그리고 은지누나의 퇴사를 맞아서 3일 전에 충동적으로 계획한 여행이다. 나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보상을 한 번 주고 싶달까.
인사이드아웃 불안이에게 기쁨이 하는 얘기가 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타인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 다음으로 오랜만에 마음에 박히는 말이다.

지미의 졸업논문에 낯 간지러울 정도의 애정어린 헌사가 적혀있었다. 그런 보석 같은 순간 앞에서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다. 나는 참 복도 많다.
떠다니는 오리, 살짝 언듯한 손, 그리고 상쾌한 찬 공기만이 나의 지금이다. 말마따나 모든 순간들이 stochatic gradient descent이니, 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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