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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기둥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3년 12월 6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7일

전역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퀀트 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운 지도 3년이 다 되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뉴욕의 퀀트 헤지펀드로 가서 제대로 사고 한 번 쳐보겠다는 일념 하에 내 나름 정말 열심히 했다. 매일 증시를 하루도 빠짐없이 3시간씩 뒤져보고, 매주 시황분석 글과 매매일지를 성실히 기록하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노는 건 최대한 자제하고 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공부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저 높이 가기 위해선 응당 견뎌야 할 담금질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뭐해먹고살아야 고민하는 친구들이 태반인데, 내 길에 있어 이토록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여겼다.


이지컴, 이지고. 한 순간에 이유 없이 강한 이끌림을 느낀다는 것은, 한 순간에 이유 없이 싫어지기도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투자에 흥미가 없어진 것은 그토록 한순간의 일이었다. 돈따라기가 된 나 자신이 싫어졌다니, 업계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안 멋지다니, 마음이 바뀐 이유를 콕 집어내보고도 싶었지만, 그냥 내 마음이 식은 것이었다. 너무 좋아서 내내 한곡 듣기를 돌렸던 노래가 어느 순간 팍 질려버리듯 말이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부정도 해봤지만 나는 전만큼 투자가 재미있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권태인가, 아님 근본적인 생각이 바뀐걸까.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애당초 퀀트를 왜 한다고 했을까 되짚어봤다. 말로는 투자가 재미있어서, 세상만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어서라고는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런 순수한 흥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가장 좋고 멋져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학창 시절 내내 좋은 대학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 줄세우기, 서열놀이. 배운 게 도둑질이라, 대학교 와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한 것뿐이었다. 적성이고 뭐고 가장 멋지고 좋아 보이는 걸 찾았다. 멋지기도 하고, 지적 수준의 장벽이 높기도 하고, 성공했다는 소리 듣기 좋으니까.


반발심도 있었다. 자기 자식 바르게 키우고픈 부모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아빠엄마는 너무 "돈돈" 거리는 걸 싫어했다. 특히 엄마는 배워서 남 주라는 말을 나한테 줄곧 해왔다. 구구절절 틀린 말 하나 없지만, 그땐 그게 답답하고 싫었다. 아니, 내가 죄짓는 것도 아니고 돈을 좇는 게 무슨 문제인가. 거기에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가 실물자산 뻥튀기에 자본소득을 찬양하던 때였기에 더더욱 동요된 것도 있었다.  <데미안>에서 "악은 선의 일부"라는 말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나는 그걸 어줍잖게 해석한 것이다. 악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 만들고, 선을 악으로 취급해 버려, 결국 또 하나의 선악구도를 만들고, 다른 쪽을 배척해 버리는 멍청한 짓이었다. "욕심 앞에 솔직해지는 게 최고다. 착한 척하는 것은 팔자 좋은 소리일 뿐이고." 뭐 이런 식의 염세적인 생각 말이다.


물론 그땐 정말로 투자가 재미있어서 그랬다. 밤을 새가면서 공부해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 뒤 속내를 감추는 자기기만이 추호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방향성에 대한 의구심이 나를 이렇게까지 무너뜨릴 줄 몰랐다. 이게 내가 반년 가까이 불안함에 시달리는 이유의 8할은 설명하는 것 같다. 근 3년간 퀀트에 대한 목표의식은 나를 받쳐주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난 그거 빼면 남는게 얼마 없는 사람이었다. 그 유일한 기둥이 무너지니 모든 것이 쓰러져버린 것 같다. 원래는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석사 마치고 업계에 발도장 쾅 찍겠다는 계획이었는데, 마음이 이렇게 바뀌니 방향성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여름 동안 일이 지지부진하게 원체 안 풀렸는데, 그게 도화선이 되어 여름내 거진 신경증 환자처럼 지냈다. 가을 지나 코 끝에 겨울이 닿는 지금도 여전하다.


버거운 학기다. 목적 없는 인내는 사람을 금방 지치게 한다. 나는 너무 쉽게 지친다. 자존감 바닥, 의욕 없음, 집중력 저하, 우울함, 불안함, 조급함, 열등감, 이러니 될 일도 안 되는 악순환. 어휴... 이번 학기가 대학교 기간 동안, 아니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버거운 것 같다. 중간고사 끝나고 짧게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학교로 돌아가는게 너어어무 싫었던 기억이 있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어령 선생님 책이었나, 그런 얘기가 있었다. 하나에만 인생 건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맞는 것 같다. 분산투자는 비단 돈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삶은 더더욱 그렇다. 나를 받치는 기둥이 하나보다는 많아야 하는 것 같다. 아니면 마음이 가난해진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을 시간낭비로 여기고, 10분 만에 식사를 해치우고, 10시 이전에 도서관을 나오면 찝찝해하는 것. 그게 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다가 담은 행동이었다.


소중한 대학생활을 왜 이렇게 재미 없게 태워먹었나 억울함이 들기도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하자. 내 근성의 역치를 못해도 두 배는 올린 시간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진짜 후회하면 내 노력이 깡그리 부정 당하는 기분이다. 그건 진짜 못 견딜 것 같다. 어떻게든 의미가 있었다고 믿고 싶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접근법은 분명 지혜롭지 못했다.


이렇게 살기 싫다. 억울해서 안 되겠다.


이번엔 기둥을 여러 개 세워야겠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투자에서 분야만 바꿔 이번에는 데이터과학이라는 기둥 하나만 세우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좀 주입해야겠다. 친구들이랑 좀 놀면서 풀어지기도 하고, 헬스 말고 다른 운동도 좀 해보고, 책도 좀 완전히 생뚱맞은 것도 읽어보고 말이다. 그건 해이함이 아니다. 잘 사는거다. 노력 포르노는 그만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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