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마르크스주의
- Minwu Kim
- 2024년 2월 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6월 27일
알랭드보통에 <On Love>에 "romantic Marxism"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를 쉽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 비해 나는 한 없이 못 났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런 선망의 대상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우러러 볼 사람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잘 것 없다는 방증이니까.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가 "나는 좋아하던 남자애가 나한테 고백하면 팍 식더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듣고 "지랄을 한다"고 핀잔을 줬었는데, 아무튼 그게 바로 전형적인 로맨틱 맑시즘이다.
내가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적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좋다는데, 그런 감지덕지한 일이 또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어쩌면 나는 여태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한 분야에 막연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달려들었다가, 막상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나면 "별 거 아니었네" 하고 팍 식어버린다. 웹앱을 만드는게 멋져 보여서 뛰어든 소프트웨어 개발은 생각보다 훨씬 손이 가는 허드렛일이었다. 물론 개발도 파고들어가면 끝도 없지만, 당시엔 친구 하나랑 우스갯소리로 개발자가 "디지털 벽돌공"이라고 했다. 개발보다 훨씬 더 까리해 보여서 건드려 본 데이터과학도 똑같았다. 파면 팔수록 통계는 믿을 것이 못 되고, 블랙박스 머신러닝 모델은 꼭 벙어리장갑 끼고 하는 촉감놀이 같다. 정말 열심히 했던 투자도 비슷했다. 무슨 가치평가니 차트분석이니 매크로분석이니 웬만한 건 다 건드려봤다. 하지만 소수만 아는 쉽게 돈 버는 비기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끝 없는 사고와 절제를 통해 확률적 우위를 쌓아가는, 흡사 도 닦는 것 같은 과정만이 투자로 돈 버는 길이다.
이번 학기 배우고 있는 강화학습도 그런 것 같다. 강화학습이야 말로 인공지능의 정수인 것 같아 큰 기대를 갖고 수업을 신청했다. 그리고 3주가 지난 지금 이 분야가 뭐하는 분야인지 대충 윤곽이 잡히고 있다. 결국 또 일련의 수학 모델링이고, 결국 또 컴퓨테이션 파워 태워먹는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이다. "심층"강화학습도 별게 없다. 그저 우리가 알 수 없는 액터나 크리틱이나 워드함수를 뉴럴네트워크로 추정하는 것 뿐이다. 물론 꽤 흥미로운 개념인데, 막상 이해하고 나면 크게 놀라운 것도 아니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이 이해를 하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일지도 모르겠다. 여태 공부와 일에 대한 내 동기부여는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었지 않았을까. 원피스 마냥 놀라운 것을 꿈꾸며 한 분야에 달려들지만, 막상 그 내부 생리를 대강 파악하고 나면 "그렇게 대단한 건 없었네" 하고 짜게 식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실망할 때 마다 "아직 소양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 진짜 대단한 걸 접해보지 못해서 그런 걸거야" 하고 다음 발자국를 밟아갔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나 자신이 실체 없는 환상을 뭉게뭉게 부풀린 것 뿐.
당장 내 졸업논문도 그렇다. 남들한테 내 졸업논문을 설명할 때 내 연구가 "별 대단할 것이 없다"며 평가절하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대충 미국 주식 데이터랑 행동주의 펀드 캠페인 데이터 긁어모아다가 예측 모델 돌려보는게 전부입니다. 전형적인 분류문제죠." 이런식으로 내 연구가 시시하다는 듯 설명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게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처음엔 그냥 예의상 하는 소리가 아닌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분들은 진심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야 몇 개월을 삽질하며 이 모든 지식들이 내 것으로 체화가 되었지만, 그 분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별 것"이니까.
이런 일도 있었다. 저번 학기 교수님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조금 도움을 드린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유야무야 마무리가 되었다. 끝난 뒤 나와 같이 교수님을 도왔던 친구랑 밥을 먹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한 나와 달리, 그 친구는 그 스타트업 경험이 자신의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속으로 "쪽팔리게 어떻게 감히 꼴랑 그거 갖고 스타트업을 제대로 경험해봤다고 말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틀렸던 것 생각 같다. 그런 흡사 보잘 것 없어보이는 경험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저 나 자신이 그걸 "별 거 아니다"라고 무시한 것이다.
크고, 웅장하고, 거대하고, 경이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 내 삶은 눈부시게 찬란할거라는 붕 뜬 기대. 한 때 전설이 되고 싶다고 일기에 적어뒀었다.
생지옥 같았던 조급함과 자기혐오의 원천이 여기 있지 않았나 싶다. 나름대로의 성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황된 기대치 탓에 내가 여태 해온 일들을 깔보고 평가절하했다. 늘 부족함을 느꼈고, 부족한 만큼 나 자신을 증오했다.
어차피 무엇이든 알고 나면 별 게 아니라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조금은 자긍심을 가져도 되지 않나 싶다. 당장 졸업 논문만 봐도 그렇다. 별 거 아니라면 진짜 별 거 아니다. 아니, 진짜 개구리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지 싶다. 하지만 내가 반 년 넘게 정리해온 연구 관련 노트들을 보면 그 속에서 신경써야 할 디테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것만으로 나는 내 일에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괜찮지 않나 싶다.
사실 개인의 발전에 있어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현재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건 근래 자기혐오에 너덜너덜해졌던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 같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애정하는 법 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는 仰望星空하는 방법보다 脚踏实地하는 방법이 더 시급하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행동주의 팀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그냥 프라이드 이빠이 가지고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별 대단한 연구가 아니라며 수그리고 들어갈 일이 아니다. 내 깜냥껏 아주 열심히 해서 나름 학계의 최신 방법론들을 연구에 녹여냈다. Causal forest나 SHAP-tree-based heterogeneous TE analysis 같은 방법론이 나한테야 쉬운 일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신선한 컨셉이다. 그러니 놀라운 걸 들고 온 것 마냥 자랑하듯 발표해도 되지 싶다. 충분히 자긍심 가져도 될 일이다.
앞서 얘기했듯, 어쩌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막상 알고 나면 별 거 없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허드렛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무슨 DARPA에서 과학자로 일하는게 아닌 이상 웬만한 건 다 주먹구구식의 일들이다. 그리고 그건 실망할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아무리 대단한 지식이든 일이든, 결국 머리에 익고 손에 익으면 더 이상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 것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해온 일들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이 옳다. 그게 자기비하에 가까운 겸손보다 훨씬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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