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
- Minwu Kim
- 2023년 12월 28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7일
이번 학기 학점도 4.0이다. 운영체제에서 하나 삑사리가 날 줄 알았는데, 교수님의 커브는 그 각도가 거진 커쇼였던 것 같다.
목표를 "4.0 놓치기"라고 정했었다. 하나는 별 의미 없는 학점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고 싶어서였고, 둘은 내가 학교 공부에 손을 뗐을 때 학점이 그대로 떨어져 줘야 내 그간의 노력들이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건 내가 학점에 너무 신경 쓴 건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떨떠름하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 한 학기 더 남았으니까 최대한 알차게 보내봐야겠다.
왜 이렇게 학점 받기 쉬워졌나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내가 대학생활 3년 넘게 하면서 나름의 요령이 생긴 것도 있겠지만, 그냥 요즘 들어 성적 받기 쉬워진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보아하니 학점 인플레이션은 미국의 범국가적 현상 같다. https://www.wsj.com/articles/grade-inflation-makes-a-the-new-c-participation-trophy-quiet-quitting-hiring-2c480b80
늘상 하는 얘기지만, 돈의 흐름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 8할은 설명이 된다. 요즘 대학은 고등교육기관보단 취업사관학교의 성질을 갖는다. 석박사는 몰라도 최소 학부는 그렇다. 졸업생 아웃풋이 학교 역량 평가에 지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학교들은 졸업생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학점을 퍼주다시피 한다. 수업의 난이도를 내리고 기준을 낮춘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노력만 하면 학점 사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대학교부터 학생들에게 수업 좀 안 들어도 큰 일 안 나니 공부는 적당히 하고 취준에 몰두하라고 장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무엇인가, 가치하락을 의미한다. 개나 소나 학점이 높다면 채용하는 기업들 입장에서도 높은 학점을 잘 안쳐준다. 나처럼 학점에 과히 신경을 쓴 사람은 손해를 본다.
높은 학점이 큰 가치가 없어도 열심히 배운 지식 자체의 가치는 높지 않느냐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수업의 질이 영 떨어진다. 이는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할 것 같다.
첫째로는 대학교 시스템의 문제이다. 교수들이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마냥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강의에 진심인 교수님들도 몇몇 계시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연구에 관심이 훨씬 많다. 교수 업무 평가에 있어 연구 실적을 티칭에 비해 훨씬 많이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 이 동네는 그렇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교수들은 수업은 어느 정도 구실만 맞추어 놓고 몇 년 동안 같은 수업을 오토파일럿 돌린다. 강의에 드는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의 질이 떨어진다. 물론 대학교부터는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지만, 교수님들이 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유튜브의 인도형님들한테 가서 메꿀 때마다 이게 맞나 싶다. 내 돈 내고 들었으면 참 분했을 것 같은 수업이 한두 개가 아니다. 심지어 나 정도면 어려운 수업들도 나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했는데에도 말이다.
둘째로는 사회적 분위기다. 블루팀 국가들은 전체적으로 Liberal 한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진보적 사상이 추구하는 것 중 하나가 적극적인 기회의 재분배인데, 이것이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생긴다. 대학교에서는 수업의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특히 미국의 대학교는 전공을 2학년 때 고르는 경우가 많은데, 컴공 같은 인기과들은 학생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그런 학생을 모두 품어주기 위해 대학은 수업의 난이도를 낮춰버린다. 비슷한 일례로 최근에 한국 고등학교 과정에서 미적분 & 기하학을 빼버렸는데, 이런 경우 더 많은 학생들이 포기하지 않고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겠지만, 특출한 학생들 역시 그 안에 가둬버리는 단점이 있다. 더 가다간 정치 이념 얘기가 되어버릴 것 같으니 이 얘긴 여기서 멈춘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학점은 예전만큼 따기 어렵지 않으며, 대부분의 수업은 퀄리티 마저 높지 않다. 학점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최적과는 거리가 먼 전략이다. 투자로 치면 물가가 펑펑 뛰는데 실물자산 안 사고 미련하게 현금만 손에 쥐고 있는 멍청한 짓인 것이다.
이 얘기를 왜 이리 구구절절하게 했냐면, 다음 학기 궤도의 수정을 하기 위해서다. 몇 주 전에 쓴 일기에선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은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니, 막 학기에도 어려운 수업으로 꽉꽉 채워 넣자"라고 다짐했는데, 생각할수록 영 아닌 것 같다.
그럼 학점이란 현금 대신 내가 매수 할 수 있는 실물자산이 뭔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연구 같다. 학교 안에만 있어 쉽게 망각하는 부분인데, 학부생 나부랭이가 교수님들과 이토록 가까이 붙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널려있는 건 우리 학교 밖에 없다. 일반적인 대학교는 박사와 포닥이 교수님의 총애를 받고, 아무리 못해도 석사는 되어야 연구다운 연구를 할 수 있다. 이걸 내가 몰라서 섣불리 다른 학교 가서 연구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학부생에 타교생이니, 교수가 관심을 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참 아쉽다 악). 하지만 우리 학교는 상황이 다르다. 석박사 품귀인지라 수업에서 요놈 쓸 만하다 싶으면 바로 데려간다.
고로 마지막 학기는 연구에 내 총력을 갈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강신청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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