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 Minwu Kim
- 2024년 6월 3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5일
연달아 일이 있어서 글을 쓸 타이밍을 계속 못 잡았다. 그래도 나름 학부씩이나 졸업했는데, 글 하나 없이 흘려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싶다.
그 야자수들 아래서 엄마아빠누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기묘한 경험이었다. 뭐랄까, 단절된 두 세계가 합일한 기분이었달까. 몰랐는데, 집 밖과 집 안의 내 모습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족들 사이에 있으면 약간은 멍청해지고 헤퍼진다. 마치 술에 살짝 취한 것 마냥 말이다. 졸업을 핑계 삼은 가족 여행 내내 그런 기분 좋은 상태로 다녔다. 사진들을 보면 항상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마냥 웃고 있다.
이번 여행은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었다. 이번엔 그 전의 모든 가족 여행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돈독해도, 가족 여행을 가면 나와 다른 세대의 어른과 함께한다는 약간의 이질감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정말로 친구들이랑 여행을 다닌 기분이었다. 이게 아빠엄마가 젊어진건지, 나랑 누나가 나이를 먹은건지, 아님 양쪽에서 한 발짝 씩 서로 다가간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든게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고 좋았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가족을 보내고 돌아오는 택시에서 "죽을 때 까지 가끔씩,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자주 떠오를 추억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니 저러니 설교해대는 걸로는 장광설을 손쉽게 뽑아낼 수 있는데, 감정 표현만 하려고 하면 내 어휘가 가난해진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어디 대단한 단어나 비유를 꺼내봤자 그건 말장난에 불과 할 것 같다. 뭐, 그래도 괜찮다. 정말 좋았다는 것을 이렇게 명시적으로 상기시켜주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의 배는 조금 부른다.
사실 이번 졸업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감흥이 없다. 주위에서 수고했다고 그렇게 축하해주는 걸 보면 나도 괜히 벅차오르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기분은 좋지만 막 대단히 감격스럽다거나 하진 않다. 그냥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벌어져야할 일이 진행 된 기분이다. 마치 월요일 뒤에 화요일이 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아서 그런 애틋함이 없는건가 생각했는데, 그 정도 이유로는 내 무던함의 반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6년 전 고등학교 졸업 땐 이렇지 않았다. 그 땐 분명 기념비적인 한 페이지를 넘긴 기분이었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을 해봤다. 고등학교 3년은 진한 4B 연필심을 종이 위에 짓이기듯 그어낸 직선 같은 시간이었다면, 대학교의 6년은 물의 파동 마냥 면으로 퍼지는 시간이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한가지 목표를 향해 달렸던 시간과 달리, 지난 6년은 내 나름 방황의 시기였다. 목표도 바뀌어갔고 생각도 바뀌어갔다. 가끔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뭐가 뭔지 모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꼴랑 대학교를 나온다고 끝나는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나이대에서 으레 겪는 과정이지만, 누구나 겪는다고 별 거 아닌 것이 아니다. 각각의 개인에겐 커다란 것이며, 당연히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2년 전, 본인 부모님이 졸업식을 참석하지 못하니 내가 대신 남아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그렇게 학교에 남아 친구의 졸업식을 보며, 2년 후에 내가 단상에 올랐을 때는 후회 한 점 남기지 않고 누구보다 멋지게 떠나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 날이 오늘이 된 지금, 현실은 내가 그려왔던 그림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2년 사이에 내게 극적인 발전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이은 헛발질 탓에 이룬 것도 많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潜移默化。가랑비에 옷이 젖듯 변해간 시간이었다. 훈수꾼이 여덟 수 더 본다고, 매시매초를 한 순간도 빠짐 없이 이 몸뚱아리에 깃들어 살다보니 나 자신의 변화를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것 뿐이다. 마치 어릴 적 오랜만에 만난 동네 이모만이 내 키가 컸다는 것을 알듯이 말이다. 대학교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집을 나와 이 사람 저 사람, 이 나라 저 나라, 이 책 저 책을 조우해가며, 나라는 사람은 적잖이 변해왔다. 6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타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르다. 그리고 나는 내 변화한 모습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이만 하면 충분히 괜찮게 보낸 6년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이 학교를 와서 여러모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 자신의 삶을 살 수는 없기에, 어떤 선택이 더 좋았을지는 죽을 때 까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 대신 여길 선택한 것에 대해선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흔히들 세상이 "넓어졌다"고 표현을 하는데, 사실 더 와닿는 표현은 "좁아졌다" 인 것 같다. 아득하고 막연해보이던 세상이 많이 가깝고 또렷해졌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크기는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좁아졌다는 것은 내가 커진 것이라고도 볼 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애교심이 그렇게 크진 않다. 이를테면 캠브리지에 있는 두 학교 중 하나라도 갔다면 티를 못 내서 안달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든 부연 설명이 많이 필요한 학교에 막 엄청난 프라이드를 갖진 않았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이 대학교라는 딱지가 내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는다는 소리이다. 지금 보면 그것도 되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겐 감사한 마음 뿐이지만, 내가 이 둥지를 벗어난다고 해서 큰 무언가를 잃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앞으로의 여정도 꽤 봐줄 만 할 것이고, 종종 아주 멋질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이제 만연체 안 쓰기로 했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 채로 적다보니 또 술주정 같은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의 글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일단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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