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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4년 6월 26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5일

정해진 근무 시간은 9시에서 5시이다. 하지만 딱히 지키진 않는다.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특히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일하는 두세 시간이 가장 좋다. 그 때는 하루가 끝나고 덤처럼 주어진 추가시간 같다. 그래서 아무런 부담이 없다. 밤의 끝을 잡고서 "하나만 더"를 반복하다보면, 끝 날 때 즈음에 생각보다 많은 일을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땐 기분이 좋다.


후배 하나랑 같이 일을 한다. 근면하고 책임감 넘친다. 그리고 꽤 유능하다. 좋은 동료가 있는 것은 꽤나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 후배 덕에 나름 선배가 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후배가 나한테 이것 저것 물어보는데, 생각보다 자주 좋은 답을 줄 수 있었다. 대학교 4년 동안 공부해봤자 머리에 든 건 많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앎이 쌓여가고 있으니, 또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얘는 이래서 불편해, 쟤는 이래서 안 맞아." 이런 속단들은 자신의 세계를 좁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진다는데, 벌써부터 이러기엔 나 아직 스물넷이다. 사람과의 연대도 많은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래서 불편함을 감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덕에 새 친구들이 몇몇 생겼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자극을 준다. 조금 과잉된 표현이긴 한데, 이런 것들이 내 영혼의 세계를 넓히는 행위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나 역시 타인의 세계를 확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타인이 내 취향을 알아가고자 시간과 노력을 쓴다,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인 것을 느낀다. 내가 흘리듯 언급한 책을 어느 날 읽고 와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해줬다. 또 누구는 내가 좋다고 한 앨범을 듣고 와서 잘 들었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작품에 대한 각자의 느낀 점을 공유하는 것은 꽤나 멋진 정신적 교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추천받은 책, 추천받은 노래를 몽땅 다 읽고 들었다.


예술과 철학을 논하는 것에 대한 갈증은 늘 있어왔다. 다만 그런 얘기가 너무 빈번해지면 남들이 지루해할까봐 말을 아껴온 부분이 있다.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을 웹사이트에 내 생각을 늘어놓는 것도 내 나름 해갈의 방식이다. 하지만 타인의 따분함은 지레 한 짐작이 아니었나 싶다. 주위에 그런 대화를 원하는 사람은 충분히 있다. 이제 좀 자주 꺼내봐도 괜찮을 것 같다.


근래 추천받은 책 중 하나는 <편의점 인간>이었다. 잘 읽었다고는 했지만, 사실 많이 별로였다. 나름 <인간실격> 같은 걸 흉내 내보려고 용 쓴 것 같다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오오바요조와 달리 후루쿠와라는 캐릭터는 설득력이 없다. 진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남들과 똑같이 아픔, 고통, 괴로움, 열등감을 느끼지만, 그걸 차마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 본인이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한, 그런 방어기제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는 나름 좋다고 추천을 한 것일텐데, 어디에서 끌렸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특성 상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책은 독자의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책이 되려면, 적당한 때에 나를 찾아와야 한다. 마치 청소년 권장도서여서 읽은 <데미안>이 중학교 때는 아무런 울림이 없었지만, 지금와서 다시 읽었을 때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것과도 같다. 그리고 <편의점 인간>이 지금의 나에게 와닿지 않은 건, 현재의 나는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읽었다면 감상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유퀴즈에 허준이 교수님이 나왔다. 허교수님의 축사는 내가 근 몇 년 간 본 글들 중 가장 울림을 준 글이지 않았나 싶다.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가 읽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괜히 다시 한 번 곱씹어 봤다.


그것도 그건데, 다시 읽어보니 다른 대목에도 눈길이 간다: 자아는 단일하고 연속적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는 잠깐 나와 함께하는 타인일지도 모른다. 고로 그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이기심이 아닌 사랑의 실천일지도.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아직 내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조금 더 영글어간다면 그 말의 의미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 하나의 글귀를 마음에 묻어두었다.


이제 식권이 안 나온다. 종종 저녁 차려먹기 귀찮을 때 학교 건너편의 슈퍼로 간다. 거기 푸드코트 메뉴들이 가볍게 떼우기 딱 적당하다. 거기에는 와이파이가 없다. 그리고 나갈 일이 별로 없어서 휴대폰 데이터도 재충전을 안 했다. 독서 앱이 있긴 하다만, 조그마한 스크린으로 책 읽기는 영 안 내킨다. 그럼 거기서 멍 때리며 우물우물 밥을 먹는다. 외부 자극이 차단 된 그 공간에선 온전히 미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


샤와르마를 먹고 싶었는데 매진이 됐다. 그래서 대신 오늘 저녁은 버거로 골랐다. 소고기 패티가 짰다. 다행히 바비큐 소스가 다소 밍밍해서 중화가 됐던 것 같다. 양파는 덜 구워서 매운 맛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번은 다소 기름졌다. 감자튀김은 속이 말랑했다. 감자를 충분히 말리지 않고 그대로 튀긴 것 같았다. 그래도 소금을 좀 더 치니 먹을 만 했다. 의도적으로 "맛을 제대로 음미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니다. 그저 글을 쓰는 지금 맛을 떠올려보니 하나하나 다 생각이 나는 것이다. 외부자극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뉴욕에서 종종 혼자 식당에 들어갔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사람 구경을 한다. 이 역시 의도적으로 구경을 한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게 별 거 아니지만 꽤 재밌다. 그 때 참 평화롭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감각은 여행 고유의 느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걸 너무나도 익숙한 학교라는 장소에서 느꼈다. 작년 말에 <여행>이란 일기를 썼는데, 일상을 찬미하는 것에 대한 실천이 아니었나 싶다.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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