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짓는다는 것
- Minwu Kim
- 2024년 4월 3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8일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사적 언어“라는 개념이 있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신적인 존재 하나가 나에게 이상한 영적체험을 시켜줬다고 하자. 나는 이게 너무 신기해서 내가 경험한 바를 친구들한테 알려주고 싶다. 이 감각은 이 세상에 없던 것이라 나는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 (편의상 x라고 하자)를 만들었다고 하자. 하지만 이 x를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 봤자 그들은 공감할 수 없다. 나와 달리 그런 이상한 경험을 못해봤으니 말이다. 그래서 x라는 단어는 결코 널리 쓰일 수 없다. 결국 x는 나 혼자 아는 단어, 즉 사적 언어가 된다.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사적 언어를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행위이다. 그리고 언어의 확장은 사고의 확장이다. 이런 삼단 논법에 의거한다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사고를 확장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어디서 선정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22년 올해의 단어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이 단어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다들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여태 그걸 설명할 알맞는 단어 없었는지라 그랬다고 생각한다. 은근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든가, 교묘하게 사람을 심리적으로 묶어둔다든가, 오묘하게 이상한 내러티브를 주입시킨다든가 등등, 사실 인간사회에 만연하게 있어온 일들이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설명을 하려고 하면 마땅한 표현이 없어 혀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가스라이팅”이라는 편리한 다섯 글자짜리 도구가 주어졌으니 너도 나도 옳다거니 하고 쓰는 것이다.
이런 단어는 사람의 에너지 소모를 크게 줄여준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 가스라이팅을 당해도 그게 가스라이팅인지 몰라서 빨리 상황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을 거라고 본다. 그렇게 긴가민가 하며 자기 정신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이 하나 생겨버리면 이를 알아차리는데 훨씬 쉬워질 수 있다.
새로운 단어의 힘은 편리함에 그치지 않는다. 임팩트도 강하다.
사실 모든 단어는 다른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단어 하나가 다른 단어들로 이뤄진 문장으로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뛰어난 설득을 통해 타인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잘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단어와 풀어쓴 설명은 완벽히 동일하지 않다. 저 예시의 "설득", "의심", "현실감" 등등의 단어들은 너무 많이 소모된 단어라, 우리의 뇌는 그 단어들에 대해 각자의 기억이나 이미지를 달아놓았다. 그에 반해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새하얀 도화지와 같다. 그 단어에 대한 이미지는 그제서야 새롭게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새 단어가 주는 임팩트는 풀어쓴 설명보다 훨씬 세다. 아주 단순한 예시로, 부부들끼리 “자기야”, “여보” 등의 흔한 애칭을 쓰는 경우도 있고, 서로만의 애칭을 지어주는 일도 있다. 낯 뜨거워도 후자가 훨씬 애틋할 수밖에 없다. 전자 같은 경우 이미 닳고 닳은 단어지만, 후자는 오로지 그 두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단어의 생성은 엄청난 힘을 가진 일이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 역시 존재한다. 새로운 단어가 남용되며 생겨나는 현상이다. "꼰무새"라는 말이 있다. 연장자가 뭐만 하면 앵무새처럼 꼰대라고 치부해버리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게 어른의 조언은 힘을 잃는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꼰대를 자처하는 사람도 생겨버렸다. 예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민희진 기자회견 영상을 보니, 그 밑에 뉴진스가 민대표한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악플이 달려있더라. 그런 식이면 세상 모든 친밀한 관계가 가스라이팅의 성질을 갖는다. "플러팅"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든다. 종종 친절함 마저 플러팅이라며 치부해버린다. 아니, 설사 정말 수작부리는 것이 맞더라도, "플러팅"이라는 단어를 붙여버리는 순간 그 행동이 저렴해보인다. 좀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런 예시는 끝도 없이 있다.
딱히 결론은 없다. 그냥 생각 나서 써봤다. 써봄직한 생각이다 싶어서 끄적여 봤는데, 막상 쓰고 나니 생각보다 재미없는 글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써놓은게 아까우니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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