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직
- Minwu Kim
- 2024년 4월 3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12월 14일
어찌저찌 하다보니 1년을 또 남게 되었다. 하루 빨리 이 동네를 뜨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여러모로 너무 조건이 좋아버렸지 뭐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시각은 비뚤어져 있다. 그걸 교정하려고 이 일기를 쓴다.
장점을 나열해보자:
첫째로, 커리어적으로 이건 누구봐도 업그레이드이다. AI쪽을 파는데 딥러닝 연구를 하는 것 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 기업은 연구 경험, 논문 구현 경험을 높이 산다. 대학원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건 어쩌면 석사 학위보다도 값어치 있는 경험이다.
둘째로, 분야가 재밌다. 강화학습은 투자에 이어 간만에 진짜 꽂힌 분야다. 알고리즘들을 보고 있으면 딥러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나는 이 공부가 어느 정도 적성에 맞지 싶다. 지금 이 일 저 일에 치여사느라 바쁜데, 이런 연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교수님 워킹페이퍼를 보니 Q-learning에 transformer를 짬뽕시키는 연구를 하고 계시던데, 상당히 흥미로워 보인다. 이런거 1년 건들다보면 딥러닝 기초는 많이 탄탄해질 것 같다.
셋째로, 교수님이 좋다. 교수님은 빅네임이다. 물론 DRL연구는 2017년 부터 시작하셨고, 그 전에는 네트워크 쪽으로 이름을 날리신 분이다만은, 아무튼 연구 성과를 보면 여전히 현역이다. 당장 아주 겉핥기 식으로 생각해봐도, 대학원 지원만 생각해도 교수님의 추천서는 끝발이 꽤나 살 것이다. 그리고 그런 네임밸류를 차치하고서라도 교수님이 마음에 든다. 붕뜬 소리 없이 건조하리만치 간결하게 핵심만 얘기한다. 거기에 티나지 않게 날선 유머감각이 있다. 딱 내 스타일이다. 보다 보면 사람이 뭉근한 카리스마가 있다. 이런 사람 곁에 있으면 비단 커리어 뿐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넷째로, 나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옵션이 없다. 1순위였던 아재네 회사는 역량 부족, 내지는 핏이 안 맞아서 아쉽게 떨어졌다. 취준 내내 고배를 마셨지만, 사실 구직에 아주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아재네한테 떨어지고 씩씩대며 지원서를 난사했는데, 벌써 꽤 괜찮은 곳 세 곳 정도에서 서류 합격을 했다. 한 곳은 코테도 잘 봤고 나머지 두 곳도 곧 면접을 볼 예정이다. 이런 식이면 아무리 못해도 졸업 후에 두어달 뽈래뽈래 구직하면 괜찮은 곳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설령 합격을 하더라도 그런 기회들이 이 연구보다 나은 기회인 것 같지가 않다. 사실 이런 건 1년 지나고서도 다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이 RA는 이때 아니면 못 잡는 기회다. 그리고 이거 1년 하면 기회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 같다. 최근에 지원서 돌리면서 JD를 읽다보니, 그걸 더더욱 여실히 느꼈다.
다섯째로, 이 랩을 나를 필요로 하는 눈치다. 이번 기회는 내가 먼저 찾아간게 아니라 교수님이 먼저 제의를 한 경우다. 그 잘난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오려 한 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다. 포닥인 조지도 내가 랩에 합류한다고 하니 진심으로 반기는 눈치였다.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인지 과제를 잘해서인지, 조지가 평소에 나를 좋게 봐준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고 싶은 건 당연지사이다.
여섯째로, 조건이 꽤 좋다. 물론 이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건 내 능력 이상의 급여임을 안다. 내가 이 곳을 나와서도 곧바로 그만큼의 연봉테이블을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서른 전에 돈 벌 생각도 크게 없으며, 감사하게도 생계상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는가.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내 걱정의 원천을 따라가보자.
첫째는, 아무래도 이 학교를 뜨고 싶다. 정말 감사한 학교이지만, 요즘은 매일매일 도망을 치고 싶다. 이 갑갑한 학교에만 있으면 숨이 막히고 잠도 잘 못 잔다. 이 캠퍼스에는 내 수많은 실패의 기억들과 상처로 점철되어있다. 그리고 외딴 섬에 너무 오래 단절이 되었는지라 이 곳의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 그래서 일단 뜨고 보고 싶다. 한동안 제정신이 아닐 때는 정말이지 매시매초 도피를 염원했다.
둘째는, 연구에 대해 정말 안 좋은 기억들이 있다. 세종에선 방치되다시피 다뤄져 힘들었고, 캡스톤도 방임에 시달려 증세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깔짝였던 교수님의 스타트업도 붕뜬 소리에 이골이 났다. 그럼에도 이 짓을 다시 하겠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지도 모르겠다.
셋째는 이건 좀 쪽팔리고 간사한 마음인데, 학교에 남아있는 것이 좀 쿨해보이지 않는다. 진작 떠야할 거 못 뜨고 질질 끄는 느낌이랄까. 이 곳의 세상은 너무 좁고, 만나는 사람과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거기서 거기다. 안락하다가도 갑갑하다. 너무 오래 머물렀고, 나는 세계의 확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건 뭐, 앞에 두개에 비하면 문제라고 칠 수도 없다. 그냥 내 반골기질, 아니 홍대병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1년 정도는 더 버텨볼 수 있다.
걱정이 있다면 피하거나 마주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금 내 마음은 거의 확정이 되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감사한 기회이다. 이 모든 심적 스트레스를 감수하고서라도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러니 현재 내겐 정면돌파라는 선택지 밖에 없다. 그러니 최악을 상정해보고, 파훼법을 강구해본다.
일단 최악의 상황이다:
첫째, 학교에 대한 답답함이다. 최악의 경우, 1년 정도 더 숨을 헐떡이며 불면에 시달리는 괴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둘째, 연구에서의 헛발질이다. 이제 더 이상 성과 없는 헛발질은 싫다. 나는 이제는 좀 가시적인 성과, 즉 페이퍼로 이걸 뚫어내야 한다. 만약 또 방치가 된 채로 시간을 버리게 된다면, 나는 진짜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 하나의 실수를 용납하기엔 내 마음의 체력이 바닥이 났다.
그 다음은 해결법이다.
첫째, 학교에 대한 답답함이다. 그제도 한 숨도 못 자고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이 장소에는 너무 많은 상처들이 베어있다. 그래서 말이다, 일단 도망치는 것이 있겠다. 7월 중순에 일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여행을 떠날거다. 정말 오랜만에 중국에 갈 수도 있고, 저기 동남아 가서 스쿠터 끌고 횡단을 할 수도 있겠고, 저 멀리 마추픽추 찍고 올 수도 있겠고, 혼자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버틴 어바인의 재키를 보러 갈 수도 있겠다.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나는 일상으로 부터의 온전한 도피, 그것도 한 달 이상의 도피가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서도 그렇다. 자주 나가야겠다. 차를 렌트할까도 생각중이다. 그리고, 이건 쉽게 될는지 모르겠는데, 쌓인 불신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보다 열린 마음으로 지내볼까도 부단히 노력해봐야겠다. 다만 과거의 극복이 그렇게 쉽게 될는지는 사실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도 좀 골골대고 있으니까. 그리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군대에서도 그랬다. 6개월 동안 부대에 갇혀있을 때, 눈 뜨면 보이는 2층의 매트리스를 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꽉 막힘을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잘 버텼다. 그리고, 어쩌면 장소에 대한 괴로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일터가 생기면 또 거기서 마음 고생할지도 모른다. 장소는 문제가 없다. 내 기질, 내 마음이 문제다. 어차피 내가 이겨내야할 일이다. 게다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타인이다.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와 또 다른 사람이다.
둘째, 지난 연구경험에서 오는 공포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님께 좀 과할 정도로 분명히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방임되는 것에 너무 나쁜 기억들이 있다고. 같이 긴밀히 협업하고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꼭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런 부분을 충분히 교수님도 인지하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한 말이 다소 걸린다: "우리의 팀은 크고, 모든 이들에게 리서치 퀘스천을 물어다 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이 괜찮다면 지원하라". 이 얘기가 꼭 1년 전 세종에서 들은 얘기와 비슷해서 사알짝 찜찜하다. 더 이상의 방임은 정말 감당할 수 없다. 한 번은 불운이라고 치자. 두 번째로 반복된다면 그건 내 실수다. 이를 최대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지와도 커피챗을 요청했다. 랩의 워크플로우에 대해 제대로 탐구를 해보고자 한다. 내일 모레인데, 한 번 제대로 파악해보자. 그리고, 필요하다면 교수님 랩을 거쳐간 선배들까지 싹 다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다. 내 1년을 위해선 이 정도 사전 조사는 필수다. 그리고, "인지하고 있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투자 격언이 있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나는 이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주의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문제가 터질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리고 나는 해당 의견을 교수님께 이미 충분히 피력을 했기 때문에 교수님도 이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고로, 나는 이를 감당할 수 있다.
학교에서 겪은 상처와 실패들, 어쩌면 이것이 약 1년 간 내 정신을 갉아먹던 해충들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 기회는 이 상처들을 정면돌파하는 일이다. 어쩌면 미련하지만치 자기파괴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모르고 겁대가리 없이 달려드는 것과, 알면서도 다시 그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것은 그 용기의 무게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그 여파도 후자가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든다. 버텨내지 못하면 녹아내리고, 버터내면 제련이 된다. 할 수 있다. 이젠 뚫어나갈 때도 됐다.
그리고 말이다, 감사하단 생각이 든다. 긍정을 챙기려던 새해의 다짐을 상기시켜본다. 이 모든 것이 내 나름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막학기에도 농땡이 치지 말자는 마음 덕에 이 수업을 듣게 되었고, 이 수업 덕에 교수님을 만나뵙게 되었고, 수업을 열심히 수강하고 평소 학점도 탄탄하게 잘 챙겨서 이 기회도 잡은거다. 얘기 들어보니 지원한 사람이 일곱명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낮다면 낮은 경쟁률이지만, 그 중에서는 그래도 내가 교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니, 충분히 잘한 성과이다. 그러니 오늘은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노력은 이런 식으로라도 보상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니 지나온 실패에 속지 말자. 잘하고 있다. 노력들은 다 나한테 돌아온다. 단기적 변동은 불규칙해도 장기적 추세는 배신하지 않는다.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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