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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마음

  • 작성자 사진: Minwu Kim
    Minwu Kim
  • 2023년 12월 22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7일

겨울에 삿포로에 갈까 하다 이내 관뒀다. 대신 평창 가서 콧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1년에 여권에 도장을 10개씩 찍을 만큼 열심히 여행했는데, 이제는 여행이 그만큼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던가, 이제 여행이라는 자극에 무뎌진 듯하다. 유럽 도시 어디를 가든 비슷한 돌바닥에 비슷한 성당이고, 산을 가든 바다를 가든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 같다. 물론 아직 안 가본 곳들이 많지만 가봤자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의 총량이 있다면, 나는 그걸 대학교 시절에 몰아서 쓴 것 같다. 배 부른 소리지만, 모든 건 과유불급이라 좀 아껴가며 다녀볼 걸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중에 직장다니면 그럴 기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못 갈 걸 대비해 미리 여행을 가는 것도 웃긴 일이다. 여행이 무슨 저축도 아니고 말이다.


여행은 가장 최상위의 유흥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특히 물질보다 경험을 소비하는 것을 더 쳐주는 요즘 시대정신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 번 갔다 오는데 150은 우습게 깨지는 비싼 행위임에도 사람들은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한다.


여행이 그토록 특별한 이유가 무엇일까. 순한 맛의 LSD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잡스 전기에서 잡스 본인의 창의력의 원천은 LSD였다고 했다. 궁금해서 이에 대해 좀 찾아봤었다. LSD를 복용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은 아름다워요”,  “자연의 천태만상이 참 신기하고 놀랍지 않나요” 등의 감상에 젖은 얘기를 한다고 한다. 어디 경이로운 걸 본 것 마냥, 마치 처음 서울 상경해서 눈 돌아가는 촌뜨기처럼 말이다.


이 현상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패턴을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식으로 진화해 왔다. 덕분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랄 줄 알고, 폭포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걸 알고, 날아오는 축구공의 궤적이 어떻게 될지도 안다. 우리 뇌 속에 이런 패턴 찾기의 프로세스를 관장하는 부위가 있다. 그리고 LSD는 이 부위를 이완시킨다고 한다. 이 부위가 이완되면 우리의 패턴 파악 능력이 저하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고, 평소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주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LSD는 마술쇼를 보는 것과 얼추 비슷하다. 사람의 몸이 3단 분리가 되거나,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오거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일상속 물리법칙에 위배되는 일, 혹은 우리가 알고 있던 패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기함을 느낀다. 특히 영유아들은 성인에 비해 이 부위의 작동강도가 약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호기심이 많고 세상만사에 질문이 많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행 역시 본질적으로 비슷한 행위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곳에 떨어져, 나와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내가 못 봤던 건물양식을 눈에 담아 가며 걷는 매시매초는 새롭고 생경하다. 뇌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눈앞의 모든 것이 평소와 달라 우리의 뇌가 패턴을 쉽게 못 찾는 것이다. 오감이 받아들이는 낯선 정보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뇌는 평소보다 훨씬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렇게 평소에 경험하기 힘든 뇌 속 작용들 덕에 우리는 여행의 설렘을 느낀다.


고로 여행에 흥미를 전만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LSD에 내성이 생겼다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란 것이다. 같은 걸 눈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번 여름 내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왔었다. 내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도시를 투어 시켜주었는데, 관광객이 바라보는 서울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꽤 오묘한 경험이었다. 서울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거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한국의 역사를 알아본다거나, 이태원 다리 위에서 남산타워를 보고 즐거워한다거나 말이다. 내게는 일상이 되어 너무 당연해진 것들이 그 친구에겐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드는 생각이, 어쩌면 아름답고 놀라운 것들은 꼭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쳇바퀴 같은 일상 곳곳에 콕콕 박혀 있겠구나 싶다. 아름다움은 늘 거기 있었는데 내가 그걸 보는 눈이 없었을 뿐이다.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내가 있는 곳이 곧 여행지가 아닐까 하는 낭만 어린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진 않는다. 사람 생각 그렇게 쉽게 안 바뀐다. 다만 일상에 아름다움이 충분히 차고 넘친다는 것을 머리로나마 인지했다는 건 큰 도약이지 않을까 싶다. 하루에 5분이라도 일상을 찬미할 수 있으면 내 마음이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여튼 연말이 되면 사람이 좀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다. 이런 글도 다 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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