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 Minwu Kim
- 2024년 3월 9일
- 4분 분량
한 유치원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들 둘, 그리고 그 엄마까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먼저 나가고, 애들이 뒤따라 나갈 때였다. 그때 문이 닫히려고 하자, 내가 급하게 손을 갔다댔다. 그리곤 애들이 마저 나갔고, 문이 반 쯤 다쳤을 때, 둘 중 뒤에 있던 애가 뒤돌아보며 나를 보고선 싱긋 웃어줬다. 그 웃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덩달아 빙구 같이 활짝 웃었다. 꽤 영화적인 모먼트였다. 도서관에 도착해 자리에 앉고서도 몇십초 동안 그 아기의 웃음을 곱씹었다.
요즘 아가들이랑 접점이 좀 많다. 오늘도 그랬고, 사흘 전에도 그랬고, 한 3주 전에도 그랬다. 그 애는 애기까진 아니고, 한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는 친구였는데,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나한테 와서 자기 핸드폰 충전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라. "플리즈" 꼬박꼬박 붙여가며 정중하게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비슷한 나이일 때 아빠가 꽈배기 사오라니까 그게 무서워서 싫다고 찡찡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던 나와 달리 씩씩하게 어른한테 부탁하는 걸 보고 기특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튼, 요즘 아가들 보면 사람이 말랑해지는 것 같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친척누나 집에 놀러가서 조카를 보고 있으면, 두시간 정도 귀엽다가 나중 가선 피곤하다. 진짜 애들 체력은 이 세상의 활력이 아니다. 그래서 늘상 "아기는 멀리서 보는게 제일 귀엽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아기를 나보다 훨씬 좋아해서, 슈돌 나오는 애기들 인스타 팔로우 하고 배경화면으로도 저장하고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이해가 안 됐다. 자기 애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 애기를 보고선 누나가 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요즘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런 말랑한 생각이 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꼴랑 스물넷 먹고 여성호르몬 분비가 많아진건지, 아님 그냥 그 애들이 유독 예뻐서였던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진심으로 애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아기를 갖는 것에 생각을 크게 안 해봤다. 결혼은 아직 어린 나와는 먼 얘기로 보였고, 하다 못해 지금 어쩌다 보니 연애 안 한지도 오래됐다. 그래도 그냥 막연히 나중에 나도 결혼하고 애 낳고 살겠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명제에 의심과 반기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요즘 한국이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결혼과 출산을 더 이상 필수요소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고민을 이따금씩은 했던 것 같다. 내가 꼭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하는 생각 말이다. 어디 얽매이지 않은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내 커리어 욕심 꽉꽉 채우면서 살아도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요즘 드는 생각은, 나는 결혼도 하고 애도 갖고 싶다는 것이다. 뭐랄까, 삶의 목적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둔다면, 나의 분신과 같은 내 아이를 갖는 경험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그 길을 밟아간 선배들을 보면 애를 낳은 것에 후회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본 것 같다. 아 물론, 내가 너무 결혼 생활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에게만 질문을 던져서일수도 있겠다. 매형은 사촌누나랑 결혼을 더 빨리 안 한 걸 후회한다고 했고, 그 누나는 나만 봐주는 두 아기들을 보며 큰 자존감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빠한테도 얘기를 했었는데, 누나랑 나를 가진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세상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나한테 알려주기도 했다. 아빠는 누구보다 따뜻하지만 말로는 사랑 표현을 잘 안 하는 경상도 사내인지라 입에 발린 말 잘 못한다. 그런 아빠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 만큼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Y combinator의 폴 그레이엄도 결혼전도사 중 하나다. 이 분이 자기 블로그에 쓴 <having kids> 라는 글이 있는데, 이거 보면 진짜 아기 갖고 싶어진다. 정부에서 출산율 높이려면 헛 돈 쓰지 말고 사람들한테 이런 거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자기 자신도 한 때는 부모가 되는 것이 싫었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도 한 때 정말 야망이 넘쳤던 사람이었고, 부모가 되면 그 일에 그 만큼 집중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worth it하다고 한다. 그리고 방송에서 "야, 너는 결혼하지 마라" 하는 사람들도, 말은 그렇게 해도 실상은 행복해보였다. 마치 그 행복 본인만 누리고 싶어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마치 결혼과 출산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삶에 있어 구원이 되는 것 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주워보고 들은 걸 통해 인지하고 있다. 애 키우는 건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고, 정말 큰 희생과 인내를 감내해야 한다. 아빠들은 배가 나오고 못생겨지고, 엄마들도 살이 찌고 젖이 축 처진다. 총각 처녀 때와 달리 평소에 잘 꾸미지도 않아서 후줄근한 옷들만 입는다. 그게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얼마나 큰 희생인가. 그리고 당장 사촌누나네 집에서 애들 놀아주다가 2시간 만에 지쳐서 뻗었을 때, 그걸 매일 하는 누나가 정말이지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엄마는 누나랑 나 어떻게 키워냈나 싶기도 하다. 오히려 그래서 너무 궁금하다는거다. 그런 희생을 하고서도 그것이 가치있다고 것인데, 그게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싶다.
마치 첫 연애와도 같다. 연애에 대한 환상만 뭉게뭉게 커져서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다가, 별의 별 짓 다해가며 찌질의 역사를 장황하게 써가며 지지고 볶아봐야 시간이 지나고서 그 밑에 기저한 복잡하고도 기묘한 매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너무 힘들었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이 그랬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비일상적이다. 다만, 연애와 출산이 다른 점은, 실패시 기회비용의 체급이 다르다는 것이다. 연애야 뭐, 툭 까놓고 말해서 헤어지고 몇 달 힘들어하면 그만이지만, 애를 갖는 것은 평생의 책임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건 절대 돌이킬 수가 없다. 요즘 보면 그 책임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더욱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경험이다. 그걸 모르고 죽는다면 내 인생은 꽤나 불완전할 것 같다. 물론 고작 이런 겁없는 생각으로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을 누가 보면 어리고 대책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요즘 같은 세대에서는 더더욱 계산기를 두들긴다. 하지만 원래 결혼은 모르고 겁 없이 해야 한다고도 한다. 일단 저질러놓고 하는 것 말이다. 우리 엄마아빠 세대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엘리베이터의 그 아기를 보면서, 저 엄마아빠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 애도 저렇게 예쁜데, 그게 본인 자식이라면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싶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아빠도 나를 보고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엄마아빠도 부러워졌다. 내 모습을 닮은 내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싱긋 웃는 모습을 나는 꼭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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