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그리고 인식의 지평
- Minwu Kim
- 2024년 2월 10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2일
좋은 사람이고자 했던 노력들이 되려 나를 좀먹은 사람 만든 것 같다. 흔히들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착한 아이 증후군은 전혀 착하지 않다. 부당함을 참는 것, 분노를 억누르는 것, 제 할 말 똑바로 못하는 것. 본인의 작은 그릇으로 품지 못할 것들, 그런 것들을 주제 넘게 담아내보려 악을 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고 여기는, 자기 연민에 찌든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런 인간 개극혐이다.
그렇다 보니 요즘 "좋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선과 악은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일단 좋은 사람이 뭔지 알아야 좋은 사람이 되니 마니를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선과 악은 인식의 지평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여기서 인식의 지평이란, 내가 어느 정도까지 헤아릴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장발장이 생계가 어려워 빵을 훔친 것에 사람들은 동정을 한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죽인 금수새끼를 보복 살인을 해도 사람들은 이해한다. 이런 일들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코패스가 비인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오로지 재미를 위해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비행청소년 역시 사람들의 분노를 산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 바깥의 일, 수용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지평은 사람마다 다르다. 지평이 극단적으로 좁은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구나 동료까지 인식의 지평이 다다른다. 그리고 인식의 지평이 한없이 넓으면 살인자나 중범죄자 같은 개차반들, 나아가 인간이 아닌 동식물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 이를테면 열반에 다다른 싯다르타나, 원수를 사랑하라 했던 예수그리스도 같은 같은 성인이 그렇다. 이렇듯 개개인마다 인식의 지평에 따라 선악을 구분짓는 선이 전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함", 혹은 "착함"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다. 남을 존중한다든가, 예의를 갖춘다든가, 서로 양보한다든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환경보호를 예시로 들어보자. 환경을 위해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타거나, 쓰레기를 꼼꼼히 분리수거를 하는 건 모두 좋은 일이라고 칭찬하는 일이다. 하지만 옷을 생산하는데 생기는 환경오염 때문에 나체로 돌아다닌다면, 화력 발전이 대기오염을 일으킨다고 전자기기를 일체 거부한다면, 나아가 "암세포도 생명이잖아요" 이 지랄을 하면서 항암치료를 거부한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대개 과하고 피곤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저것을 "선"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그만큼까지 인식의 지평이 닿지 못해서 그런 행동들을 "과하다"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예시가 좀 우스꽝스럽긴 했는데, 아무튼 이 점을 이해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상당 부분 설명된다. 낙태 합법화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거기에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없다. 책임지기 어려운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말도 말이 되고, 낙태는 살인 행위이며 생명 경시의 풍조를 야기한다는 말도 말이 된다. 그저 생각의 차이, 혹은 인식의 지평의 차이일 뿐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 차고 넘친다. 다만 사회는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기에, 가장 다수의 인식의 지평을 잣대 삼아 규범, 도덕, 그리고 상식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선악의 개념,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다분히 주관적인 가치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선악의 개념이 주관적이라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느끼기에 좋은 것과 싫은 것만 있을 뿐, 선악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노력할 이유가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과연 성숙한게 꼭 좋은 것일까. 자기 잇속만 채우는 욕심쟁이들이 말년에 심판을 받고, 남들에게 한 없이 베푼 이들이 끝에 평안하게 영면하는 그런 서사가 팔리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 역시 허상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자기 잇속만 채우는 인간들은 어차피 자기가 개차반인 거 끝까지 모르고 죽을 인간들이다. 아니, "개차반"은 그저 내 인식의 지평에만 해당되는 얘기고, 그 사람의 인식의 지평에 있어서는 본인은 나쁘지 않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내 인식의 지평을 잣대로 남에 대해 선과 악의 꼬리표를 붙이지만, 나보다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은 누군가는 나를 한 없이 한심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그걸 알 길이 없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통 속의 뇌, 즉 자신의 오감의 신호들을 의식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객관적인 실재에 결코 닿을 수 없는 자폐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구태여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내 인식의 지평 안에서 생각하기에, 그 안에서만 자족할 수 있다면 장땡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유치하긴 한데,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인식의 지평도 최적화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인식의 지평은 광광(广广) 익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너무 좁지도, 너무 넓지도 않은, 적당히 뭉근한 정도가 최선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이 위와 같은 정규분포를 띈다고 가정해 보자. 일단 너무 왼쪽으로 가도 안 좋다. 자기 잇속만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포도 중간에 위치한 대다수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이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너무 오른쪽으로 가도 안 좋다. 대다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기에 지지를 못 받고 외로울 것이다. 물론 잘하면 타인의 존경 정도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게 정녕 나 자신을 위한 길인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파 하는 것은 지적 욕구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겠다. "공감도 지능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식의 지평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헤아릴 수 있어야 확장이 가능하다. 이는 상당한 지적능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 아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은가. 쥐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나불댔다가 나중 가서 대가리 굵어지고 쪽팔려했던 경험. 그 수치심과 후회를 줄이고 싶어서 최대한 지평을 확장하고파 하는 것이다. 고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파 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지적 욕구의 메커니즘과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저 가설이 맞다고 가정하면,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앎은 다다익선인가? 되려 식자우환 아닌가? 앞서 얘기했듯, 쪽팔리는 것도 깨달아야 쪽팔릴 수 있다. 만약 모르면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걸 느낄 수가 없다. 그렇게 평생 모르고 살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저 정규분포 어딘가에서 생을 마감한다. 지평의 확장은 끝이 없어서, 넓히고 넓혀도, 계속해서 쪽팔려하다가도 나아진 나 자신을 보며 이내 만족하는, 마치 무간도처럼 끝도 없는 쳇바퀴일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굳이 아득바득 너바나의 경지에 올라보겠다고 나 자신을 채찍질할 이유가 있을까. 앞서 얘기했듯 정규분포의 평균값 부근에 적당히 걸쳐놓는게 오히려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내 논리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최적화 문제를 풀려면 목표함수를 정의해야 한다. 지금 그 목표함수를 몰라서 헤메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함수는 무엇인가. 이는 내 가치관과 신념에 달린 문제이다. 만약 내가 종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이나 붓다라는 이데아에 닿기 위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왕 태어난 김에 즐길 거 다 즐겨보고 재밌게 살다 가야겠다는 보다 가벼운 긍정적 허무주의자라면, 나는 그냥 적당히 타인과 어우러지는 지평 정도를 유지하며 둥글둥글 살아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 가치관의 차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선과 악을 어떻게 구분 짓는가 -> 선악은 인식의 지평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개념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 그건 가치관에 따라 갈리는 문제이다.
네 가치관은 무엇인가 -> 에... 크크루삥뽕 으히히
결국 또 가치관의 문제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 삶을 바쳐 싸워낼 숭고한 가치는 무엇일까. 있기는 할까.
이 문제만 해결하면 만사형통인데, 하필 그게 제일 어려운 문제다.
진짜 하나님이라도 믿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된다. 믿어버리면 끝. 진짜 너무 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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