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 Minwu Kim
- 7월 7일
- 1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4일
그 당시 의대를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입학과 동시에 20년 뒤까지 뻔히 그려지는 미래가 싫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랜덤박스를 그렇게 일찍 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 너머에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조금 더 오래 유지하고 싶었던 마음. 내 미래가 불투명한 채로, 뿌옇게 남아 있기를 바랐던 마음.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대학교에 입학한 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마냥 달갑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직도 스스로를 '컴퓨터공학도'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색하다. 전공이라는 단어가 곧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라벨이 되고, 내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여섯 글자로 나를 정의할 때마다, 내 미래의 해상도가 조금씩 또렷해지는 것 같아서, 다중우주의 수많은 근사한 나 자신을 지나쳐 간 것 같아서, 조금은 찝찝한 기분이 든다. 삶이 그저 평범하게 흘러가길 바라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뜻밖의 비범한 잭팟이 터지길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분명히 있다.
이제는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성공은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의 걸음들이 쌓여 점점 가까워지는 거라는 걸 알기에, 이제를 미래에 대해 보다 뚜렷한 해상도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이런 AI라는, 불멸과는 거리가 먼 가장 빠르게 바뀌는 휘발성 높은 분야에서 종사할 생각을 하자니, 나 자신을 인공지능 연구자라고 일컫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부분이 아직도 마음 한 켠에 자리한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가볍게 먹기로 했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했듯, 지금 이 순간, 동적인 형태로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외골수의 길을 걷게 되면 그런 대로, 또 다른 전환의 순간이 온다면 그 또한 그런 대로, 그렇게 지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시간에 빙결된 시대의 산물이니까. 그걸 애써 부정해봤자 나 자신만 초라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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