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조각집
- Minwu Kim
- 4일 전
- 1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일 전
부분 부분이 모여서 그림이 된다.
만추에 애나가 왜 남의 포크를 가져다 쓰냐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참 오묘한 연출인데, 슬픔의 번지수를 찾지 못한 영혼이 엉뚱한 곳에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처연하다. 우스운 짓에 처연한 당위성을 부여하면 예술적일까. 아니 그냥 탕웨이가 그래서 예술인건가.
가로사옥 아홉번째 방에서 울리는 "하일에 꾸던 어느 꿈"은 何日에 꾸던걸까 夏日에 꾸던걸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름날이기엔 비트에 여름 풋내가 나지 않아 전자이겠거니 했다.
머쓱한 것은 표정일까 사람일까. 유치원에서 이쁘장한 짝꿍 앞에선 뚱한 척을 했지만, 캠코더 앞에서는 해수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더랬다. 어떤 방어기제와 수치심은 그 시작을 알 수가 없어, 태어날 때 이렇게 생겨먹었나 생각을 하게 된다.
"들뜨지 말자"라는 이름을 한 알사탕이 한 동안 오른쪽 볼따구니를 볼록하게 채우고 있었다. 녹았나보다. 그래서 왼쪽에 하나를 더 넣었다. 다시 볼이 볼록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빨리 녹기를 바란다.
"내가 알기로 나란 사람은" 이라는 희한한 화법을 구사하는 모과아재는 가능한 많이 변화하는 것이 방향성이라고 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도 내게 닿지를 않아 이렇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 빙의한 척 늘어진 문장을 써내며 땡깡을 피우는 것이다.
오바요조 흉내는 이제 못 내겠다. 그 다음 할 말은 뭐가 있을까. 요즘 고민이다.
음악에 재능이 없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인 것 같다. 적지 않은 글들은 읽으면 "내가 써도 이것보단 낫겠다"는 마음이 심심찮게 고개를 치켜든다. 그에 반해 음악은 전혀 감각이 없다. 지식의 저주와는 거리가 먼 청정구역에 가깝다. 영원히 막귀할래 난~
90년대의 일본의 시티팝과 코로나 시대의 음악은 서로를 닮았다. 버블 경제의 끝자락에서 구가하던 내일 없는 낙관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오늘에만 집중해야 했던 고립의 음악들. 극과 극은 통하나보다.
클라인블루나 세룰리안은 언제나 봐도 예쁘다. 오늘 밤은 파란색 꿈을 꾸면 나쁘지 않을지도. 저기 서양사람들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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