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 Minwu Kim
- 2024년 5월 8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6월 22일
군대에서 한창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때, 온갖 운동 유튜버들을 섭렵했다. 빡빡이 아저씨 같은 고수 분들의 영상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같이 운동 하는 것이 일과 후 최대의 낙이었다.
영상들을 보면 하는 얘기가 각자 조금씩 다르다. 당장 턱걸이라는 하나의 운동만 해도 하는 소리가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숄더패킹을 하라고 하고, 누구는 데드행을 하라고 한다. 누구는 팔꿈치를 앞으로 보내라고 하고, 누구는 옆구리 쪽으로 붙이라고 한다. 누구는 오버 그립을 하라고 하고, 누구는 썸리스그립을 하라고 한다. 누구는 베어핸드로 하라고 하고, 누구는 스트랩을 끼라고 한다. 누구는 세트 당 1분30초만 쉬라고 하고, 누구는 3분 씩은 쉬어주라고 한다... 그럼 까까머리들은 체단실에 모여서 각자 본 영상들을 토대로 서로 훈수를 둔다.
최선의 방식을 찾으려면 결국 내가 이 동작 저 동작 직접 다 해봐야한다. 어떤 동작이 자극을 가장 많이 먹는지, 등딱지가 가장 당기는지 직접 느껴봐야한다. 하다 보면 "오오... 이거다" 하는 때가 온다. 그 기분으로 운동하는거다. 그리고 그 동작은 사람마다 다르다. 체형이나 체질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 좋은 아저씨들이 늘 하는 말이 "나랑 맞는 운동법이 가장 올바른 운동법"이란 소리이다.
사실 이건 유튜브라는 매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유튜브는 누구나 영상을 올릴 수 있고,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선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영상들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체공학 논문 같이 보다 공신력 있는 정도를 뒤져본다면, 어쩌면 척척박사님들이 이미 턱걸이에 대한 정석을 구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귀찮아서 진짜 찾아보진 않았다. 그런 거 없어도 내 등짝은 충분히 넓다. 음하하.)
그러나 설령 그런 공신력 있는 정보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무조건 옳다고 덜컥 믿을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논문은 과대평가 된 경향이 있다. 논문이라고 하면 가방끈 기다란 똑똑한 석학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내놓은 결과라고 생각해서, 일반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근 약 1년 간 여러 논문을 읽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직접 써보기까지도 하면서, 이 바닥의 지식도 생각보다 쉽게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다양한 사회과학 논문을 보아도, 무슨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느냐에 따라, 신뢰구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전제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무슨 통제변수를 넣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p-hacking이나 데이터 편집 같은 조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논문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상식 역시 그렇다.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전복되었던 사례는 역사에서 많이 있어왔다. 그 옛날 진시황은 수은이 불로불사의 약이라고 생각해 매일 복용했다고 하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도 납과 수은으로 화장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지식으로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자해행위인데, 그 때 사람들한테는 그게 상식적이었던 것이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일들도 나중 가선 미친 짓으로 밝혀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4년 전에 코로나 백신 가지고 시끌시끌 하지 않았던가. 나중 가서 보니 안티백서들이 옳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어떤 정보를 보고, 어떤 정보를 신뢰해야할까. "그러니 더더욱 꼼꼼히 살펴보고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당연한 소리를 하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다.
그것보다도, 내 "기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퀀트에서 인공지능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꼴랑 한 마디로 정리되는 말이지만, 그 사이에는 약 1년 동안 내 나름 정말 치열한 방황과 깊은 고민의 과정이 있었다. 내가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에 있어 무슨 근거로 의사결정을 내렸는지를 다시 되짚어봤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내 "기분"이었다. 투자는 전만큼 재미있지 않았고, 인공지능은 파면 팔수록 궁금했다. 나머지는 다소 지엽적인 이유였다. 물론 외부적인 정보도 한 몫을 했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인가", "업계의 흐름은 어떤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은 어떤가", "궤도에 오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인가" 등등의 요소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기분"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마치 내가 턱걸이를 할 때 내가 직접 느끼는 감각이 유튜버들 얘기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 처럼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주위에 "기분 탓"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도 종종 쓴다. 기분이란 것은 불명확하고 주관적이라 정확한 판단을 방해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턱걸이를 할 때 "오버그립이 자극이 더 잘 되는 것 같아"라고 하면, "기분 탓이야" 하고 싱겁게 일축하는 것이다. 이 말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 "기분"이라는 것을 다소 하찮게 여겨서인 것 같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동안은 "감정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자기 "기분"을 살피는 일이 행복함을 지켜나가는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아니 그걸 넘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좋은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몇 없다고 생각까지도 든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건 결국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예쁘게 개면 기분이 좋다. 해야할 일을 제 때 해치우면 기분이 좋다. 코드가 원하는대로 돌아가면 기분이 좋다. 어려운 논문을 이해하면 기분이 좋다. 방 청소를 끝내면 기분이 좋다.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주가가 움직여주면 기분이 좋다. 5키로 정도 숨 가쁘게 달리고 땀을 빼면 기분이 좋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들이랑 화상으로 수다를 떨면 기분이 좋다. 친구들이랑 술 한 잔 하면서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면 기분이 좋다. 밤에 샤워를 마치고 얼그레이티 한 잔을 손에 쥐고 이동진의 추천영화를 한 편 보면 기분이 좋다. 결국 다 기분 좋자고 하는 일이다.
적어놓고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런 생각을 진작하지 못했나 싶다. 돌이켜보면 "기분 좋은 일"을 추구하는 것이 꼭 방탕한 쾌락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 그걸 좇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기분 좋음을 추구하는 것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야식을 먹으면 당장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겠으나, 다음날 일어나면 속이 더부룩 할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당장은 편하겠으나, 내일의 내가 힘들 것이다. 성질을 부리면 당장은 속이 후련할 수도 있겠으나, 감정이 가라앉으면 죄책감이 들 것이다. 이기적으로 굴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당장은 몸이 편할 수 있겠으나, 지나고 나선 자괴감이 들 것이다. 물론 그런 쾌락적인 것에 기분이 마냥 좋은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최소 나의 기분은 그런 걸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고로 내 "기분"을 추구하는 것이 헤도니즘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고로, 나의 기분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행복을 챙기는데에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의사결정을 할 때 나는 항상 객관적인 득과실을 최우선적으로 따져왔다. 하지만 이젠 내 재무제표에 "기분"이란 항목도 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쯤 되면 오늘 하고팠던 말은 다 한 것 같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에겐 이런 글쓰기 과정도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어제 오늘 글이 좀 잘 써지는 것 같은데, 상당히 기분 좋다. 내일도 시험준비를 깔끔하게 끝내고 기분 좋을 수 있도록 이만 자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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