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 Minwu Kim
- 2024년 1월 18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8일
비록 이따금씩 우울에 침잠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내 기질 자체가 우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울한 사람이 되기엔 그럴 만한 건덕지가 없었으니까. 화목함이 족하다 못해 넘치는 집안에서 예쁨 받고 자랐고, 살면서 지금까지 별 기구한 풍파를 겪은 적도 없다. 내 삶은 감사할 것 투성이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라는 사람 자체가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부쩍 의심하게 된다.
가끔은 남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너는 왜 이렇게 밑밥을 까냐"는 소리를 들었다. 여태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나는 모든 일에 습관적으로 기대심을 죽이려고 한다. 생각해 봤는데,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닌가 싶다. 기대하다 실망한 기억들이 있다. 물론 "트라우마"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만큼 대단한 기억은 아니지만 -> 어 딱 이거다. 또 밑밥 깔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그래서 내내 염세주의와 회의주의 뒤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기대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 그럼 삶에 대한 애착도 없다. 툭 까놓고 말해서 그럼 살 이유가 있을까. 기대 없는 삶은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텨내는 무기징역수의 삶과도 같다.
긍정과 부정도 부익부 빈익빈, 肯益肯, 否益否이다. 긍정은 긍정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 긍정적 사람 곁에만 있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부정적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서 축 처진다. 실제로 자살하는 사람 곁에 있던 사람이 자살할 확률이 무려 7배나 높다고 한다. 남들의 긍부정도 그런데, 매 순간 함께하는 나란 존재가 부정적이라면, 마치 마이크를 스피커에 대는 하울링 마냥 빠른 속도로 악순환이 돌 것이다.
사실 그전에도 긍정과 감사함을 빼먹지 않고자 항상 노력했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내 감사는 다 "그렇지만 감사하다"이다. 디폴트는 부정이지만 마지막에 "아차"하고 긍정 한 스푼 넣은 것과 같다. 햄버거 빅사이즈로 먹으면서 콜라만큼은 제로콜라 먹는, 딱 그 정도의 긍정이다. 겨우 그런 식의 구색 맞추기론 부정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없다.
진짜 감사함은 "그래서 감사하다"라는 사고방식이다. 내 초기값부터 긍정이어야 한다. 항상 싱긋 웃고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보기 좋다가도 내심 세상 참 편하게 산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비치페이스로 칙칙한 표정 짓는 내가 더 멍청했던 것 같다. 그들이 나보다 몇 수는 위에 있었다.
비관은 너무 손해 보는 장사다. 안 될 것 같다 해서 정말 안 되면 "거봐, 내가 안 된댔지" 하는 게 좋을 게 과연 어디 있을까. 꼴불견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마음의 홍역을 치르고 나니 알겠다. 이 짓거리는 웬만해선 두 번 다시 하기 싫다. 사람 속 다 버려놓는다.
염세적으로 굴었더니 정말로 딱 그런 인간이 되었다. 컨셉질하다 컨셉에 잡아먹힌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나는 멜랑콜리한 감성에 심취해 그걸 낭만 삼았던 미련한 아해였을지도 모른다. 19년 여름에 갔던 파리에서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이제 다른 컨셉을 잡아봐야겠다. 어진 마음을 갖고 싶다. 조금은 헤퍼질 만큼. 대가리 꽃밭이란 소리마저도 지금 내게 칭찬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내가 또 활짝 웃으면 남녀불문 끔뻑 죽을 만큼 웃음이 예쁜데 말이다. 아껴서 얻다 쓰려고 그러나. 세상 사람 다 홀리게 아주 그냥 남발해야겠다.
지랄 총량의 법칙, 정반합을 믿는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별 대단한 신념이나 가치관도 없어서 걸리는 것도 없다. 이소룡 아저씨가 물이 되라고 했는데, 물 까진 몰라도 슬라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궤도에 올랐다. 정신도 맑고, 피부 때깔도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사람 보면 괜히 말도 잘 건다. 나 자신이 다시 좀 좋아지는 것 같다. 올해 스타트 오지게 잘 끊었다. 이대로 쭉쭉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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