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 Minwu Kim
- 2024년 1월 1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9일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2주 전 서울 국현미 전시에서 본 문구다.
군대에서 배운게 하나 있는데, 바로 도로에 쌓인 눈이 저절로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 틀락말락 하는 5시에 일어나서 툴툴대며 도로 위에 덮인 뽀얀 눈들을 긁어냈다. 그러면서 “아, 이거 다 사람이 치우는거구나” 했다. 이번 겨울에도 창 밖에 눈 닦인 아스팔트를 보면서 새벽 일찍부터 눈을 치웠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은 사실 당연하지 않다. 다 누군가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유지되는 것이다.
인도의 깡촌에 가서 독립영화 찍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과 이틀 간 부대끼면서 놀았다. 물어봤다. 10년 넘게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데, 당신들의 이야기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길래 세상 사람들에게 못 전해줘서 안달이냐고.
잊혀지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다. 본인들이 아니면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해줄 사람이 없다고, 목소리 내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들의 존재를 모른다고, 사회안전망의 변두리에서 그 선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가고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몸을 비집어 넣는 것이라고 했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올 수 있으면 참 좋겠다만,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 공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누릴 거 다 누리며 등 따숩고 배 부른 온실 속 화초 마냥 컸다. 그런 내게 존재론적 소외를 당한다는 것은 다른 세상의 일이다. 사고가 터졌는데 뉴스 보도가 안 되는 세상, 범죄가 일어났는데 경찰이 출동하지 않는 세상,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였지만 아무도 돕지 않는 세상, 누구도 나 대신 불의에 맞서 싸워주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그저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상상만 해볼 뿐이다. 내가 직접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들과 주파수를 같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원래 남의 죽을 병보다 자신의 감기가 더 아픈 법이다. 사람은 지독하게 간사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 까먹고 살 것이 뻔하다. 인식의 확장이 그렇게 쉬웠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재수없게 염세적으로 굴기는 싫다. 올해에는 좀 어진 마음을 품어보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아주 가끔씩이라도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한 것이 되게끔 만드는 이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품을 수 있으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남의 고통과 불행을 보며 감사함을 느끼는 동정심이 기생충 같아서 이런 생각을 지양했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것은 값싼 동정보다는 조금 더 봐줄만한 부채의식에 가까운 것 같다. 이 자그마한 마음이 서서히 발아하길 바라며 가슴 한 켠에 묻어둔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이 먹은 사람이 대체로 더 깊이 있는 이유는 단순히 더 오래 살아봐서는 아닌 것 같다. 나이가 주는 사회적인 기대치가 사람을 영글게 한다. 만약 내가 평생을 10살로 살았으면 내 정신연령은 10살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이십대 중반, 누구 눈에는 여전히 핏덩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내가 부여되는 기대치도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 같다. 그럴수록 나에게 부여되는 책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직접 행동하지 않고도 권익을 보호 받았던 때를 지나, 내가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되는 것 같다. 그런 책임들이 하나 둘 어깨에 얹혀져도 불평하지 않고, 내가 여태껏 타인에게 진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는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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